〔기억서점〕을 보고 너무 허망했던 나머지 이대로 끝내면 추리소설에 대한 실망감을 영원히 간직한 채 쳐다보지도 않게 될 것 같아서 다시 도진기를 찾았다. 도진기 작가의 작품도 이 정도면 됐다, 하고 더 읽기를 그만뒀었는데 너무 섣부른 판단이었다. 다시 보니 선녀? 그 이상이다. 추리 소설이 이래야지.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 도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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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별〕 이후로 읽었던 것들이 다 고만고만해서 그만 읽어야지 했던 거였는데, 그때 이걸 안 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그때 연달아 보고 만족스러웠더라면, 기억서점에서 받은 실망감을 해소할 데가 없었을 테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는 〔유다의 별〕만큼이나 좋았다. 재미있고 만족스러웠다. 훅 빠져서 홀린듯이 다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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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살해 혐의로 법정에 선 김명진을 변호하는 고진의 이야기이다. 장소나 배경의 비중만 따지고 보면 법정소설에 가깝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거의 마지막까지 김명진이 범인이라는 것으로 몰아간다. 검사가 자신만만해하는 것이 이해가 될 정도로 정황이 그렇다. 증거도 뭐,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이 사건에 얽힌 인물들과 과거의 행적이 끊임없이 연결되어 나오고, 마지막 몇 페이지를 남겨두고 끝내 그 모든 연결고리들을 풀어내는 고진이다. 이렇게 막판에 짠하고 풀어내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그래서 추리소설에 흥미를 잃은 것인데), 이렇게 긴장을 잘 끌고 오는 이야기라면 할 말이 없어진다. 독자로서 허술함을 느낄 새도 없이, 인물과 관계를 탄탄하게 엮어낸다. 그리고 사실, 내가 크게 만족한 부분은 트릭이나 진상, 진범을 밝혀내는 데 있지 않았다.
각각의 인물들을 너무 잘 만들어 놨다. 아니, 가장 마지막에 주목해야만 하는 인물을 너무 잘 만들어 놨다고 해야 하나. 이 남자의 순정에 나 쫌 울컥했다고. 곧죽어도 그 모든 걸 제 입으로는 밝히지 못할 이 남자의 속내를 낱낱이 파악해 대신 전해준 고진이 고맙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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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결혼 상대를 뽑기 위한 달리기 시합이라는 게 그저 젊은 날의 해프닝 같은 게 아니라,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떡밥이었다는 게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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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의 입을 통해 모든 것이 밝혀진 후 미련없이 끝나버리는 것도 좋았다. 그래서 진범이 잡혀가고, 징역을 받고 하는 구질구질한 이야기 없이 딱 끝나서 이 감정과 여운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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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갈 거다. 도진기 작가의 책을 빌리러. 당장 갈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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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판사 출신인 건 처음 알았다. 전에는 왜 몰랐지. 아무튼, 판사 출신이라 그런가 법정 공방이나 심리전에 전문가라는 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많았다. 이야기의 전개와는 별개로 자신이 가진 전문적인 지식을 쏟아내는 느낌이기도 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전과자라는 존재가 놀랍고 두렵겠지만 경찰 일을 하다 보면 모래알보다 흔한 게 전과 기로이다. 사실 주변의 멀쩡한 사람들도 수사 자료를 보면 음주운전이라든가 하다못해 향토예비군설치법 위반이라도 한두 건씩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피의자의 전과 조회를 했을 때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오히려 급격하게 이미지가 좋아지게 된다. 실제 재판에서 초범 운운하면서 선처를 받는 것도 그런 탓이 크다.
이유현은 검사가 현재 가진 것으로 가능한 최소한의 유효타를 노린다고 생각했다. 중형이 아니라 오로지 유죄 판결이라는 목표. 김명진이 1년형을 받든 무기징역을 받든 검사에게 큰 차이는 없다. 오로지 그녀가 유죄 언도를 받으면 된다. 그러면 기소는 성공이다. 통상의 경우 무죄를 받으면 수사한 검사와 공판 검사 모두 일단 평점이 깎이지만, 유죄 판결만 받아내면 문제 없다. 형량이 얼마든 사실 그들의 큰 관심사는 아니다. 그건 판사나 배심원이 재량으로 정하는 영역이니 검찰은 어쩔 수 없다는 논리다. 하지만 결론 자체를 뒤집는 무죄 판결이 나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건 수사를 잘못했거나 공판 수행을 잘못했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것이니까. 그래서 검찰은 무죄 사건에는 치를 떨며 100% 항소한다. 억울한 사람을 법정에 세운 게 아니라는 무언의 항변이다. 특히 이번 사건처럼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에서 유죄를 향한 검찰의 의지는 상상을 초월한다.
무죄를 다툰다면, 더구나 '살인'쯤 되는 사건에서 본인이 억울하다면 어디까지나 철저히, 단호하게 부인해야 한다. 오리발을 백 번 내밀어야 믿어 주는 사람 하나가 있을까 말까다. 그런데 정작 피고인 본인이, 만약에 내가 죽였다 하더라도 사정이 있었다는 식으로 미적지근한 주장을 해버리면 무죄라고 외쳐 주려던 사람들도 맥이 빠져 버린다. 민사에서는 이런 종류의 예비적인 주장이 자주 있다. '그 증서는 상대방이 써 준 차용증입니다. 설사 차용증이 아니라 하더라도 지급보증의 의미로 준 것입니다.'하는 식으로. 왼손 스트레이트가 안 먹히면 오른손 훅을 찔러 보는 것이다. 유효하고 필요한 전략이다. 하지만 형사사건에서는 한번 스트레이트를 뻗었으면 주구장창 그걸로 써야 한다. 오리발을 내밀었다가 닭발로 바꿔 내밀어서는 안 된다. 단일하고 절대적인 사실을 입증하고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에'라는 유보적인 태도는 금물이다. 본인이 흔들리지 않아야 믿어 주는 이도 흔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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