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

20260415 | 환(幻)과 멸(滅) / 전경린

카랑_ 2026. 4. 16.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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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은 아는데 작품은 본 적이 없어서 눈에 띈 김에 살짝 맛보기를 해볼까 하고 단편집을 먼저 골라왔다.

 

 

환(幻)과 멸(滅) / 전경린

 

 

 

 

그런데 쉽지 않다. 오. 뭐라 해야 하지. 분위기가 되게 척척하다. 축축까지는 아닌데 뭔가 되게 무겁고 힘겹고 늘어지는 느낌. 소재나 내용이 밝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추상적 어휘가 많은 문장이라고 느꼈다. 꿈이나 비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묘사도 많고 시점도 전에서 후로 일관되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회상 등을 왔다갔다 하는 구성이 많았다. 

 

장편을 하나 더 보고싶긴 한데 뭘 봐야 할지 모르겠다. 장편을 보면 감이 좀 잡힐 것같은데.

 


 

작가의 말 : 피와 꿈과 순결한 치정의 궤적

 슬픈 것들은 자신을 드러냅니다. 슬픔이 장을 밀어올리면 소리꾼의 입 안에서 아아, 소리가 저절로 새어나오는 것처럼, 때론 목젖을 다 드러내며 나를 벌리고 싶습니다. 내 속에 내 생명 이전의 슬픔이, 내 생명 이후의 슬픔이 나를 레일 삼아 무수한 바퀴를 가진 밤기차처럼 어두운 벌판길을 지나갑니다.

 나의 글쓰기는 철저히 내 삶의 여정에서 생산됩니다. 내 눈은 사슬에 묶인 삶을 발견하고 멈춥니다. 사슬을 풀 때는 어김없이 피가 흐릅니다. 억압 속에서도 사랑이, 고통 속에서도 평화가 있게 마련이어서 묶인 것을 풀 때는 늘 이를 악물어야 합니다. 피와 꿈과 순결한 치정의 궤적, 그것이 나의 글쓰기입니다. 

 언어는 허공만큼이나 광활한 우리들 감정의 모호함 속에 가리워져 있습니다. 글을 쓰는 일은 허공의 한 점을 명중시켜, 그 허공의 피 묻은 정체를 땅 위에 떨어뜨리는 일과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때로는 무엇엔가 쫓기는 분별없는 사수처럼 허공에 숭숭 구멍을 내고 탄환만 함부로 소모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숨을 모으고 고요히 오랫동안 겨냥하는 일, 세 번째 책을 내는 이 시점에서야 겨냥하는 일을 배웁니다.

 


 

 

제일 처음 나오는 작가의 말을 읽을 때부터 좀 걱정이 되긴 했다. 아. 쉽지 않은데. 어려울 것 같은데. 그리고 모든 작품 안에서 이런 느낌의 묘사와 표현들이 펼쳐진다. 아, 진짜 쉽지 않네. 

 

평범한 물방울 무늬 원피스에 관한 이야기

여자라면 한번쯤은 물방울 무늬 원피스를 입었던 일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시작한 글이 어린 시절 사촌 오빠와의 근친을 이야기하고, 물방울 무늬 원피스를 입고 선을 본 남자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몇 년이 지나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룬 뒤 다시 찾은 고향에서 늙고 살찐 사촌오빠를 보고, 들판에 선 허수아비가 예전 자신이 입었던 그 물방울 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는 것을 본다. 

 

... 이게 맞아? 

 

 

밤의 나선형 계단

엄마와 아빠 사이에 생긴 균열. 결국 떠나는 엄마. 엄마가 떠나던 날 밤 열두 살 아이가 꾸는 꿈. 그리고 엄마가 떠난 날 아침, 학교에 간 아이. 

 

그러나 여자애는 조금 웃는다. 여자애는 꿈 속에서 선생님을 이해하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전날 밤 엄마의 음성을 들으면서 엄마를 이해하려고 이미 결심했다. 겨울에 들판과 숲의 길들이 선명하게 드러나듯...... 엄마는 그 길을 따라 갔다. 누구나 노력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여자애는 엄마 없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마음 속으로 천천히 세어본다. 배가 고프면 냉장고 문을 열고 무언가를 찾아 먹을 수 있고 계란 프라이를 만들 수도 있다. 옷이 더우면 벗어던질 수 있고 추우면 더 껴입을 수 있고, 세탁기를 돌릴 수도 있다. 먼지를 없애지는 못하지만 바닥을 쓸고 닦을 수 있고 가게에 가서 필요한 것을 살 수 있으며, 명을 데리고 병원에도 혼자 갈 수 있다. 운동회엔 엄마 없이도 달릴 수 있고, 자모회에 엄마가 나타나지 않아도 마음에 담지 않을 것이며 친척들이 모이는 날에도 엄마가 부엌에 없는 것 때문에 마음을 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 모든 날에 마치 먼지에 무관심하듯 엄마에 대해 무심한 척할 수 있다. 실제로 슬픈 일 따위는 없다고 자꾸만 자신에게 타이를 것이다.  

 

아, 이 작품에서 엄마가 보여줬나.. 엄마가 봤나... 아무튼 그래서 여자애가 영화 얘기를 하는데, 그 영화가 〔바그다드 카페〕인 것 같다. 굉장히 좋아하는 영화라서 바로 알아봤는데, 내가 느끼는 영화의 감성과 이야기 속에서 인용하는 영화의 느낌이 너무 달라서 좀 튕겨나왔다. 나는 〔바그다드 카페〕를 우울에 집어 던지고 싶지 않아 ㅠ0ㅠ

 

 

바닷가 마지막 집

공무원을 그만두고 귀농한 아버지를 따라 시골로 내려온 주인공. 집에서 유일하게 밖에 나가 일을 하는 동생과 그런 동생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개, 질.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를 듣고 온 엄마는 질을 귀신들린 개라고 몰아붙이고, 한 번은 개장수에게 팔기도 했고, 그러나 집으로 찾아온 질은, 어느 비오는 밤 기어코 사라진다. 그리고 동생도. 그리고 아마도 나도. 

 

... 맞는지 모르겠다. 마지막에 떠나는 것 같긴 한데. 

 

 

고통

결혼한 동생네 집에 가던 길에 우연히 옛날에 살던 동네를 지나치게 되고,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과거 회상이다. 학교 선생님이었으나 운동권 남자친구가 있음을 들킨 뒤로는 눈치만 보게 되고, 이웃에 살던 마리와 어쩌다 함께 지내게 되고, 여러 남자를 만나는 마리와 자신을 혼동한 어린 남자애에게 추행을 당하고, 어느날 밤 집으로 찾아온 남자친구에게 오해할 만한 상황을 들키게 되고, 그러나 해명은 못하고, 그날 집앞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는 자신을 추행했던 어린 남자애인지, 변명하지 못한 남자친구인지, 뭐 그런 이야기. 

 

그러면, 그녀의 생애가 한순간 음화처럼 번쩍 드러날 것이다. 꽃이 꺾인 해바라기 줄기처럼, 줄곧 비어 있었던, 폐허에 불과한 생이. 여자는 긴 한숨을 쉬었다. 안녕, 안녕...

 

 

맨 처음 크리스마스

영화관을 운영하는 아빠를 돕는 열두 살 여자아이. 집에는 부모님과 할머니, 이모들, 동생들. 문 닫기 전 마지막 상영작이었던 벤허가 전에 없던 흥행을 이루고, 덕분에 동생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가게 되는데 정작 여자아이의 몫은 없다. 난데없이 주먹질을 해대던 남자아이로부터 난생 처음 크리스마스 카드란 것을 받게 되고, 그로부터 이십 년이 지나 성인이 된 여자 아이의 회상. 

뭔데. 이게 뭔데. 

 

 

환(幻)과 멸(滅)

주인공 아래 쌍둥이 여동생, 진과 미. 아들을 낳으려면 아이 하나를 사내 아이처럼 키워야 한다고 해서 그렇게 자라나는 아이, 진. 그 아이가 스물 다섯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가족들은 만삭이었던 주인공에게 진의 죽음을 함구한다. 하지만 꿈을 꾸고, 진의 죽음을 직감하는 주인공. 그리고 진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미의 결혼, 그러나 미의 결혼생활은 일년만에 끝이나고, 미는 오히려 진을 원망한다.진의 영혼결혼식을 준비하는 엄마, 그리고 뒤늦게 진에게 해주지 못한 것들을 후회하는 주인공. 

 

미 역시 진을 사랑하지 않았다. 진은 미의 방패막이였을 뿐이었다. 미는 크고 작은 모든 문젯거리나 자신이 저지른 실수나 잘못을 진에게 미루고 대신 벌받게 만들었다. 그에 비하면 진은 쌍둥이 언니인 미에게 짧은 인생 동안 반해 있었다. 미를 위해서라면 진은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랬다, 무엇이든... 

 

 

오후 네 시의 정거장

신아, 은환, 진수. 신아와 진수는 부부. 은환과 진수는 친구. 신아와 은환은 불륜 관계. 이제 관계를 정리하고 결혼을 하겠다는 진수에게 신아와 진수는 각각 여자를 소개시켜준다. 그리고 진수가 소개시켜준 여자는 알고보니 진수와 불륜관계였던 여자라는 이야기. 

 

그나마 제일 단순하게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이야기였다. 뭔데 이 불륜 삼각은.

 

 

거울이 거울을 볼 때 

뭐... 이것도 아무튼 불륜... 칸나색 옷을 입고 결혼했던 사촌 언니는 처녀가 아니라며 결혼이 깨졌고, 얼마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어쩌고, 그 칸나색 옷이 자기에게 왔고, 선을 봐서 결혼을 했고, 무의미하게 살다가 그림 배우러 간 화방에서 선생과 눈이 맞았고 어쩌고 저쩌고 뭐 그런 얘기였던 것 같다. 

 

 

 

 

나중에 다 까먹을 게 뻔하므로 조금이라도 정리해두자 싶어서 다시 책을 보면서까지 써 봤는데, 그러고 보니까 더 잘 모르겠다. 내 취향이 아닌 건 확실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장편은 하나 정도 읽어볼까 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이런 이야기, 이런 어지럽고 기분 나쁜 이야기라면 굳이 봐야하나 싶기도 하다. 그래. 뭔가 힘아리 없고 조금 불쾌하기까지 하다. 의도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정말 내 스타일은 아니다.  

 

전경린 작가의 제일 유명한 작품/대표작이 뭘까. 그것만 한 번 봐보까. 말까. 볼까. 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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