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볼까 말까 간만 보다가 연휴에 충동적으로 보러 갔다.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방문했던 노원 더숲아트시네마. 언제 가도 좋은 곳이다.
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 배우때문에 관심이 가는 영화였다. 나우엘 페레즈는 <맨 오브 마스크>에서 처음 보고 너무 인상적이어서 내가 <120BPM>까지 보게 만들었던 배우다. 얼굴 만만한 눈에 호리호리를 넘어선 팔랑팔랑 마른 몸. 대충 봐도 눈에 띄는 외모인데 거기에 사연 많고 애처로워보이는 분위기까지 더해지면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다.
<페르시아어 수업> 또한 그런 분위기를 폴폴 풍기는 영화였다. 수용소에 잡혀 온 유대인과 독일 장교 간의 이야기는 언제나 호기심을 유발하는 소재이고, 먹먹한 한편 놓을 수 없는 한가닥 희망을 품게 만드는 설정이지 않은가.
살아남기 위해 페르시아인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페르시아어를 배우기 위해 질(레자 준)을 살려주는 독일 장교 코흐. 초반에는 레자의 거짓말과 코흐의 의심에서 오는 긴장감이 팽팽하다. 불신을 완전히 지워버리지 못하던 코흐가 결국 폭발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지만, 정신이 없는 와중에 그동안 코흐와 주고받던 페르시아어를 중얼거린 덕분에 오히려 레자는 코흐의 의심을 완전히 지워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누구도 흔들 수 없는 단단한 우정이 형성되고, 코흐는 레자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된다.
하지만 레자는 끊임없이 의심받고 위협받는다. 처음부터 그를 의심했던 군인과 그에게 안락한 일자리를 빼앗긴 군인이 그들이다. 끊임없는 긴장감을 주기 위한 인물들인 셈인데, 그들의 결말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어쩌면 조그만 권선징악의 교훈을 주는 것 같기도 했다.
레자는 대가 없는 호의를 베푼 덕에 목숨을 구하게 되는데, 나는 이 부분이 제일 안타깝기도 하고 제일 억지스럽기도 했다. 영화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 돌아가는 것'을 언급했던 인물이 너무 쉽게 스러져 버린 것이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다. 의리나 정의가 너무나도 부질없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는데, 시대와 배경을 생각하면 그곳에서는 이런 부질없는 죽음이, 순식간에 운명이 달라지고 하찮게 대해지는 목숨이 얼마나 많았을까 생각하면 이것을 억지라고 하는 것도 그저 죄스럽고, 착잡하기만 하다.
코흐가 맞닥뜨린 현실을 보며 그를 동정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당연한 결과라고 여겨야 하는지 조금 헷갈렸다. 처음엔 조금 안타까웠지만 생각할수록 그게 맞는 것 같고, 당연한 것 같았다. 코흐가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레자를 살리긴 했지만, 결국 그것 뿐이었으니까. 개인적인 도움은 베풀었을지언정 자신이 속한 집단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코흐가 레자를 살려주고 곁에 둔 것은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서였을 뿐, 대단한 정의감이나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둘 사이에 애틋한 관계와 분위기에 현혹되어선 안 된다. 코흐는 나치의 일원이다.
레자가 기억하는 이름들을 들으며 눈물이 찔끔 났다. 레자는 살기 위해 그 이름들을 이용한 셈이지만, 덕분에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남기고 기록할 수 있게 되는 비극적인 아이러니. 텅 빈 눈으로 이름을 읊던 레자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 후의 레자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아니, 살 수는 있었을까.
너무나 감명 깊게, 정말 감동적으로 보았다고는 못 하겠다. 평이 워낙 좋기에 기대했는데 개인적인 감상으론 5점 만점에 3.5 정도 되려나. 나에게는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감동이나 울림은 아니었다.
아니 근데 나 정말 궁금한데
레자가 처음에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가서 탈출하려고 했을 때, 숲에서 만난 그 노인은 누구지? 군복같은 걸 입고 있기에 알고보면 독일군의 고위급 간부인거 아니야?? 했는데 다시 보지 못한 것 같다. 누구지? 누구지??? 누구냐고???
'보다 >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30225 | 서치2 (0) | 2023.02.27 |
---|---|
20230124 | 올빼미 (0) | 2023.01.27 |
[나이브스 아웃 : 글래스 어니언] 나는 '농락' 당하고 싶은 게 아닌데. (0) | 2022.12.27 |
20221224 | 나이브스 아웃 : 글래스 어니언 - 속편의 숙명 (스포 有) (0) | 2022.12.25 |
20221113 | 수리남 in 넷플릭스 (0) | 2022.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