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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의 화제인 책이다. 호불호가 심하다는 얘기도 들었고, 올해 최고의 책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그런 모호한 평들에 궁금증이 생기기도 했지만, '최고'와 같은 수식어가 조금 부담스러웠다. 나는 남들만큼 느끼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 그래도 어쨌든 읽어보고 판단하는 게 좋겠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Why Fish Don't Exist / 룰루 밀러

 

 

 

처음에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인물(스탠포드 대학의 초대 학장이자 과학자)을 덕질하는 내용인 줄 알았다. 그의 생애를 천천히 훑으면서 그의 발견과 업적을 재미있게 풀어놓는 글인 줄 알았지. 사실 그래서, 이게 뭐가 어떻게 특별하고 재미있어질 수 있을까 엄청 의심하며 봤다. 

 

 

와오. 스트리크닌. 와. 와아.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역류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스탠포드의 학장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 스탠포드의 설립자인 제인 스탠포드의 죽음이 얽히면서. 어?? 어어?? 

 

 

되게 신기하고 재미있는 책이 맞네. 이 책이 궁긍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제목 그대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인데, 그 결론까지 가기까지의 과정이 굉장히 의외다. 한 어류학자의 삶을 되짚으며 그의 긍정적이고 본받을만한 면모를 이야기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 사람의 연구 업적은 물론 사상까지도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증명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급격히 방향을 튼다. 

 


시간이 지나면서 허리띠에 과학적 발견의 표시를 수백 개나 새겨 넣은 이 쾌활하고 혈기 왕서한 거구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관한 이야기가 캘리포니아의 한 부유한 부부의 귀에 들어갔다. 이 부부의 이름은 릴런드 스탠퍼드와 제인 스탠퍼드로, 1890년 어느 날 이 부부는 블루밍턴까지 몸소 찾아와 자신들이 팰러앨토의 농지에 실험적으로 세운 작은 학교의 초대 학장이 되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데이비드는 그 제안에 따르는 넉넉한 봉급, 눈부신 기후, 태평양의 기름진 보물들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전망에 구미가 당겼다. 그를 주저하게 만든 유일한 요소는 스탠퍼드 부부였다. 릴런드 스탠퍼드는 악덕 자본가로 널리 알려진 공화당 상원의원이었다. 그의 아내 제인은 정규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으며, 죽은 아들과 만나려고 영매들을 찾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도덕적으로도 지적으로도 자신보다 열등해 보이는 일개 시민의 변덕에 놀아나는 놈팡이나 노리개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 봉급에 그 날씨라면... 
결국 그는 1891년 스탠퍼드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취임했다. 그의 나이 갓 마흔 살이 되었을 때다.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中

 

이 이야기가 나올때까지만 해도 그저 스탠포드 대학의 설립자에 대한 숨은 에피소드 정도인 줄 알았다. 그리고 작가가 덕질하는 대상이 이제 더 큰 물을 만나 승승장구하기 시작하는 대목의 첫구절인 줄 알았지. 

 

 

 

 


나는 계속 걸었다. 이 황량하고 외딴 언덕이 우생학적 몰살의 진원이라고 생각하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이 나라의 정체성을 정의할 때 우리가 반대하는 것이라 간주하는 그 사고방식, 우리가 초등학생에게 나치, 다른 사람들, 나쁜 놈들에게서 시작되었다고 가르치는 그 악행, 그것을 세계 최초로 국가 정책으로 삼은 나라가 바로 우리였다.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中

 

우생학까지 이르기까지 이야기가 휘몰아친다. 충격이 아직 가시질 않았는데 거기에 또 충격을 더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너한테는 네가 아무리 특별하게 느껴지더라도 너는 한 마리 개미와 전혀 다를 게 없다는 걸. 좀 더 클 수는 있겠지만 더 중요하지는 않아."
당신 머릿속에 존재하는 위계의 지도를 들여다보느라 아버지는 여기서 잠시 말을 멈췄다. 
"과연 네가 토양 속에서 환기를 시킬 수 있을까? 목재를 갉아 먹어 분해의 속도를 높이는 일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네가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그런 면에서 지구에게 넌 개미 한 마리보다 덜 중요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지."
그런 다음 아버지는 요점을 더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나는 이게 포옹하자는 신호일지 모른다고, 아버지가 "농담이야, 넌 중요해!"라고 말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좋아, 이제 이게… 전체 시간의 길이라고 생각해보자."
아버지는 자기 가슴 앞에 펼쳐진 눈에 보이지 않는 광대한 시간의 선을 손으로 더듬었다.
"여기서 인간이 존재한 기간은 요만큼이야!"
'요만큼'이라는 말을 할 때 아버지는 연극적인 동작으로 꼬집듯이 손가락들을 모았다.
"게다가 우리는 아마 곧 사라지게 될 거야. 그러니까 만약 지구 저 멀리서 떨어져서 본다면…"
여기서 아버지는 혀를 차서 끽끽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거지. 거기엔 행성들이 있고, 그 너머엔 더 많은 태양계가 있어…"

아버지가 정확히 저 단어들을 사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거의 20년 뒤 천문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이 "우리는 점 위의 점 위의 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을 때 나는 아버지의 단언과 똑같은 말을 들었다고 느꼈다.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中

 

우주와 관련된 얘기들을 보면 꼭 나오는 주제다. 이런걸 남들보다 먼저, 아주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듣고 자랄 수 있는 환경은 늘 부럽다. 

 

 

 

 

그러니까 결론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다. 처음엔 놀리는 건 줄 알았다. 일종의 비유인데, 그걸 좀 진지하게 얘기해서 나를 놀리는 줄 알았지. 근데 아니었다. 진짜로 그렇단다. 이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조금 혼란스럽다. 책에서도 코페르니쿠스의 경우를 들어 설명했었는데, 그에 버금가는(?) 놀라운 실체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상식이 깨지는 순간이 현대에서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이, 이런 충격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놀랍다. 이게 정말, 진짜라고? 

 

 

초중반까지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대한 이야기같았지만 후반에 가서 모든게 뒤집혀버리는 진짜 재미있고 신기한 책이었다. 사람들의 후기가 이제야 좀 이해가 된다.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말이 바로 이런 뜻이었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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