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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마다 재미있다고 난리였다. 뭔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엄청 재미있다고 그래서 철썩같이 믿고 보기 시작했다.
쿼런틴 Quarantine / 그렉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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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안 되어도 재미가 있을 수는 있다.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SF가 그랬기 때문에, 이 말에 대해서는 반박할 수 없다. 그래서 쿼런틴 역시 이해는 바라지도 않고 재미만 있었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해가 안 되고 재미도 없었다. 아니 재미가 없었다기 보단... 뭐랄까. 몰이해 95%에 이해 5%의 상태에서는 재미가 있어도 그것을 재미라고 느낄 수가 없달까. 집중할 수 없는 환경(사무실)에서 읽었다는 핑계를 대긴 할 건데, 솔직히 말하면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상태에서 읽었다고 해도 이해도가 90%를 넘기긴 힘들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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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니까. 거동이 불편하고 지능이 낮은 상태에서 평생을 병원에 갇혀 있던 로라라는 환자가 갑자기 감쪽같이 사라졌다. 로라의 행방을 찾아달라는 은밀한 의뢰를 받은 '나(닉)'는 로라의 흔적을 좇기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거대조직(앙상블?)에 잠입하게 되고, 거기에서 어떤 실험을 접하게 되고,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어쩌고, 양자역학이, 파동함수가, 확산과 수축이, 막 끝도 없이 새로운 개념들이 추가되고, 그것들을 열심히 설명해주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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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해보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중간중간 잠깐 정신이 들어 이게 뭔 소린지 알겠다 싶을땐 나름 메모도 해가면서 봤단 말이지.
" 따져보면 엄청나게 중요한 얘기예요, 이건. 우리 조상들 중 하나가 이 능력을 획득하기 전까지, 우주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양상을 띠고 있었을 테니까요.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고, 모든 개연성들이 공존하는 우주. " (생략) "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만, 그게 바로 우리의 존재 방식이니 어쩌겠어요.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아는' 우주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런 지식을 얻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들 대다수를 소멸시키는 우주인 거예요. " (중략)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요. 도대체 뭘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까? 은 이온을 가지고 한 작고 사소한 실험 결과에 입각해서, 인간의-그리고 아마 고양이의-조상이었을지도 모를 이 가설상의 생물이, 단지 밤하늘을 한 번 바라볼 목적으로, 빅뱅 이래 발생했을 수 있는 존재 가능한 모든 우주들의 장대하고 장려한 혼합물이라고 할만한 것을… 극히 미세한 파편으로 변용시켰다고 주장하는 겁니까? 나머지 가능성들을 모조리 말소해 버림으로써? 바꿔 말해서, 일종의… 우주론적 대학살을 저질렀다고?" "그래요. 아마 글자 그대로 대학살이었을지도 몰라요. 생물, 특히 지적 생물이라고 해서, 반드시 파동함수를 수축시켜야 한다는 법은 없어요. 만약 우리 이전에 파동함수를 수축시키지 않는 생물이 존재했다면, 우리는 그 생물도 수축시켰을 거예요. 그 과정에서 다른 문명들을 통째로 멸망시켰을 수도 있겠군요." |
그렉 이건 <쿼런틴> 中 |
그러니까 먼 항성계의 행성들이라면 아직 수축당하지 않은 부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버블 메이커>는 개체 레벨에서는 인간과 얼굴을 직접 맞대기라도 하지 않는 한 어떠한 수축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인지도 몰라요. 하지만 인류의 천문학이 점점 더 관측 정밀도를 높여감에 따라 파동함수는 위험한 수준까지 고갈되기 시작했고... 말하자면 '바다가 마르기' 시작했던 거죠. 그래서 인류가 그 이상 상태를 악화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버블>을 건조했던 거예요. 자기들의 문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던 거죠. |
그렉 이건 <쿼런틴> 中 |
"(중략) 복수의 고유 상태들이 공존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이미 1세기 전에 발견되었어요. 전자의 회절回折 패턴이라든지, 홀로그램… 이런 간섭 효과들 모두가 여기 해당돼요. 옛날에 쓰던 사진식 홀로그램은 레이저 광선을 두 줄기로 분할하는 식으로 만들었어요. 한쪽 줄기를 목표물에 반사시킨 다음, 양쪽 모두를 하나로 합쳐서 간섭 패턴을 촬영했던 거죠." "그게 확산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레이저 광선을 어떻게 두 줄기로 갈랐다고 생각해요? 광선을 은으로 아주 얇게 코팅한 유리판을 향해서 45도 각도로 쏘았던 거예요. 광선의 반은 옆으로 반사되고, 나머지는 그대로 유리판을 관통하고 지나가죠. 하지만 방금 '광선의 반이 반사'되었다고 한 건 광자들의 반이 반사된다는 뜻이 아녜요. 광자 하나하나가 반사된 고유 상태와 관통한 고유 상태가 균등하게 혼합된 상태로 확산한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만약 당신이 개개의 광자가 어떤 진로를 취하는지 관측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그 계를 하나의 고유 상태로 수축시키고… 간섭 패턴을 파괴하고, 홀로그램을 망쳐버릴 거예요. 하지만 두 줄기의 광선이 방해를 받지 않고 다시 하나로 합치게 놓아둠으로써 두 개의 고유 상태들이 상호작용할 기회를 준다면, 홀로그램은 사라지지 않고 양쪽의 고유 상태들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확고한 증거로서 영구히 남게 되죠. (중략)" |
그렉 이건 <쿼런틴> 中 |
홀로그램 얘기 좀 신기했는데, 이렇게 보니 또 뭔 소린지 모르겠네. 근데 이건 진짜 확산과 수축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만 쓰인 거 맞지? 이거 진짜는 아니고 그냥.. 가상의 개념으로 설명된 거겠지...?
뤼는 내게 숫자 조합식 맹꽁이자물쇠를 건네며 천역덕스럽게 말했다. "한 번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이 자물쇠를 열 수 있겠죠?" "주사위를 던져서 비밀번호를 알아내라고?" (중략) "아닙니다. 그냥 올바른 숫자 조합을 추측해 보십시오." (중략) 어차피 지금 와서 주저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수축하기 전에는 그 무엇도 현실이 아니라면, 나는 '이미' 수축해 있다. 이 모든 경험은 이미 선택된 것이고… 나는 누구든 간에 이미 이 자물쇠를 열 수 있는 버전의 내가 되어 있다. 그리고 내가 예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는 느낌은 전혀 없다. (중략) 나는 적어도 100억 개의 방 안에 앉아서, 적어도 100억 개의 자물쇠를 앞에 두고 있는, 적어도 100억 명의 인간들 중 한 사람이다. 만약 내가 올바른 조합을 맞힌다면 나는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지 못한다면 나는 죽는다. 단지 그뿐이다. |
그렉 이건 <쿼런틴> 中 |
"만약 누군가가 당신을 관측한다면, 두 개의 파동함수는 상호작용하고, 그 결과 하나의 파동이 됩니다. 바꿔 말해서 관찰자는 당신을 수축시킬 힘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당신도 관찰자를 조작함으로써 수축을 억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와 관찰자가 파동함수의 운명을 걸고 다툰다는 얘기야? (중략)" "원한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애당초 승부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적들'은 파동함수를 조작하기는커녕, 파동함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 뻔하니까 말입니다." |
그렉 이건 <쿼런틴> 中 |
아마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지도 모른다. 나의 모든 사고와 행위는 마지막 세부에 이르기까지 확산한 나에 의해 이미 선택되었거나, 선택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
그렉 이건 <쿼런틴>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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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거대하고 복잡한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설명은 못하겠다. 근데 읽으면 안다.
인간의 지각이 우주 대부분을 소멸시켰다.
인생이란 다른 버전의 나를 끊임없이 학살하는 행위다.
모든 꿈, 모든 비전이 생명을 얻었다.
천국과 지옥이 지상에 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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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고 이해한 부분만 조각조각 겨우 이어붙였는데도 대강 뭔 얘긴지는 알겠다. 그렇게 차근히 생각해 보니 쫌 재미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다시 읽어도 이해할 자신이 없어 그냥 이쯤에서 마무리 할거다. 근데 참 묘하게 곱씹게 되는 책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고.. 내가 나라고 하는 존재가 정말 내가 맞을까 뭐 또 다른 나의 분신, <쿼런틴>에 따르면 다른 버전의 나, 언젠가는 수축될, 소멸되어 사라질 타임라인 속의 존재. 결국 나라는 존재는 한없이 작고 미약하다는 생각에 약간의 허무주의? 회의주의? 뭐 그런 쪽으로 젖어들게 되는 부작용이 있긴 하다.
그치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자체가 재미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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