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

20241122 | 나목 / 박완서

카랑_ 2024. 11. 25.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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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의 작품이 하나의 전집으로 엮여 있어 여기저기 헤매지 않고 바로 골라들 수 있어서 참 좋다. 아마도 발표 순으로 1권부터 순서가 매겨져 있는 것 같아 이번엔 1권인 <나목>을 빌려왔다. 

 

나목 / 박완서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읽혀서 놀랐다. 막연히 그런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장황한 묘사나 설명이 한페이지 빽빽하게 들어차 있을 것만 같은 느낌. 그런데 굉장히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그야말로 '소설'이었다. 인물들이 아주 흥미롭게 배치된.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사는 인물과 그 시대에 대한 이야기-같는 거창한 이야기는 작품 분석에 맡겨두고. 나는 꽤 재미난 통속소설같은 느낌으로 읽었다. 그 정도로 잘 읽히고, 인물과 사건이 어렵지 않게 다가온다는 뜻이다. 

 

미군부대의 상점에서 일하는 경아(이경)의 이야기다. 어머니와 함께 사는 오래된 옛집은 가족들과의 추억과 비극이 공존하는 애증의 공간이다. 경아는 미군들이 가족이나 연인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상점의 프론트를 맡고 있다. 어느날 상점에 새로 들어온 환쟁이 옥히도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 강한 끌림을 느끼게 된다. 그와 비슷하게 경아에게 나타난 전기공 태수. 경아에게 애정을 쏟는 태수와 경아의 사랑을 알면서도 마다하지 않는 옥희도. 메인은 아마도 이 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뭔가... 뭔가... 함부로 말하면 안될 것 같은데... 그치만... 단순하게 '재밌다'고 얘기하고 싶고... 마냥 경아의 편에 서지는 못하겠고.. 옥희도씨는 이름이 그래서 그런가, 유부남인 주제에 경아가 다가오는데도 오키도키 하고 있는게 영 맘에 안 들고... 경아가 방황하는 걸 보면서 얘는 왜 이렇게 자기 자신을 가만히 못 둘까 싶다가도 오빠들이 어쩌다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면서 아 그렇지 어떻게 맨정신으로 멀쩡히 살아 아이구 싶어지고... 태수는.. 아마 이 작품 통틀어서 제일 좋은 사람은 태수가 아닐까 싶다. 조금은 안쓰럽기도 하고. 옥희도 유고전을 보러 가는 경아를 따라 나서는 태수는, 그럼에도 여전히 경아를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라 코끝이 좀 찡했다. 

 

 

문득문득 와닿는 문장들이 많았다. 다는 아니고 몇 개 남겨둔 것만. 

 


어떤 이는 숫제 고독을 천성처럼 타고나서 남보다 신비스럽게 돋보이기도 하고 그렇지는 못할망정 액세서리처럼 달고 다닌다거나 또는 가끔 알사탕을 꺼내 핥듯이 기호품의 일종처럼 음미하기도 하는데 나에게는 그런 편리한 재간이 없었다.

박완서 <나목>




대소쿠리, 담뱃대, 지게, 삼태기, 요란한 수가 앞뒤로 놓인 점퍼, 색이 바랜 조악한 천의 파자마, 갓 쓴 할아버지, 똥통 멘 농부의 목각인형... 우리의 것이랍시고 내세운 물건들이 외국 사람, 아니 나에게 오히려 낯설고 정이 안 간다. 팔아먹을 것의 고갈, 그렇지만 팔아먹지 않고는 연명할 도리가 없는 상태, 그런 것이 바로 가난의 상탠가 보다.

박완서 <나목>



그중에서도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은, 희한하게도, 이 대목이었다.


그렇지 나는 결코 나를 가엾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나는 내가 조금씩 소중스러워졌다. 소중한 나를 배고프게 내버려둘 수는 더군다나 없었다.

박완서 <나목>



앞뒤 맥락과는 상관없이 그냥 이 부분이 되게 좋았다. '내가' 소중해진 '나'다. 나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나. 나를 가엾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그래서 그런 나를 배고프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사소해보이지만 대단한 결심.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야지.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내가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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