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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보다

압슬형과 낙형

카랑_ 2022. 8. 30.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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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왕은 안녕하시다>를 읽고 박태보라는 인물에게 홀딱 빠졌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우연히 <박태보전> 원전을 발견했을 때
반가운 나머지 앞뒤 가리지 않고 빌려왔었다.

박태보가 심한 고문을 당할 때 받은 형벌인 압슬형과 낙형에 대한 설명이다.
소설이나 원문 속 묘사가 너무 생생하고 끔찍해서 보는 내내 내가 다 소름이 끼쳤는데
이게 실제로 행해지던 형벌이었다니 ㅠㅅㅠ

 

 

 
박태보전(한국고전문학전집 12)
이 책 『박태보전』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 선비 박태보의 이야기를, 현대의 독자들에게 사실상 처음으로 선보이는 작품이다. 그간 몇몇 연구자들이 논문 등의 소재나 주제로 다룬 적은 있으나, 현대어로 완역하여 단행본으로 출간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새로운 한국고전문학 작품을 기다리던 독자와 연구자에게, 오늘의 언어로 재탄생한 고전이 또하나 생겼다는 점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옮긴이 서신혜는 이 책의 대본인 『문녈공긔?』의 현대어역과 더불어, 작자(作者)와 창작 연대를 비정하는 학술적 성과 또한 이뤘다. 그 자세한 내용은 해설에서 소상히 밝히고 있다.
저자
서신혜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12.12.01

 

 


죄가 있는 것 같은데도 실토하지 않으면 고신(拷訊), 즉 고문을 했다. 일반적으로는 신장(訊杖)이라는 매로 때리는 방식으로 고신을 했지만, 상황에 따라 다양한 고신 방식이 사용되었다.

박태보가 당한 대표적인 고신은 압슬형(壓膝刑)과 낙형(烙刑)이다. 압슬형은 죄인의 다리 위에 널판을 놓고 물건을 올리거나 사람이 올라가 뜀으로써 죄인을 압박하는 것이고, 낙형은 인두를 불에 달궈 발바닥을 지지는 것이다. 조선을 통틀어 압슬형과 낙형을 가장 심각하게 받은 사람이 박태보라고 할 수 있다. 또 역설적으로 우리가 이 형벌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것도 박태보의 추국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압슬형을 할 때는 널판을 놓고 그 위에 자갈이나 사금파리 같은 것들을 깔고 거기에 무릎을 꿇게 했다. 사이사이 빈 곳을 사름파리 같은 것으로 채운 후 다시 그 위에 널판을 놓는다. 그런 상태에서 돌을 올리거나 사람이 올라가서 뛰는데, 이때 고통은 비할 데가 없다 한다. 또 낙형을 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발바닥만 지지는데, 박태보의 경우 몸을 거꾸로 매단 후 옷을 찢고 맨살을 인두로 지졌다. 우선 몸의 한쪽만 지지면서 나머지 한쪽마저 지지겠다고 위협하며 고신을 하였다.

압슬형이고 낙형이고 간에 말이 간단해서 그렇지 이것들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고신이다. 이를 통해 대상자가 지만(遲晩), 즉 자백을 하면 고신은 끝나게 된다.

잔혹한 고신법 중 상당수는 영조 때에 금지되었다. 숙종의 아들인 영조는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왕으로 있으면서 여러 가지 개혁을 했다. 그중에 고신에 관한 것도 포함되었다.

도둑의 경우 오늘날의 문신에 해당하는 자자(刺字)를 했다. 초범일 경우는 팔뚝에, 재범의 경우는 얼굴에 했으며, 삼범 이상은 처형했는데 영조 때에 이것을 폐지하였다. 죄인의 신체 부위를 가리지 않고 마구 때리는 난장(亂杖)이 조선 초기부터 있었는데 영조는 이것도 폐지하였다. 죄인의 두 손 모두 수갑을 채웠던 전례를 바꾸어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왼손을 풀어주게 한 것도 영조 때에 개정된 것이다.​

박태보가 당한 압슬형과 낙형은 세조가 사육신을 국문할 때도 섰다. 그러나 박태보가 고신을 받았을 때가 가장 참혹했다고 한다. 영조는 1724년 갑진년에 압슬형을 먼저 폐지하고 1733년 계축년에 낙형을 폐지했다.
<박태보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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