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무난한 재미였다. 약간의 각색을 통해 현대에 걸맞은 재해석을 시도하긴 했지만 그게 아주 크게 와닿거나, 획기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이번 국립창극단의 [베니스의 상인들]은 별로 재미가 없었던 것 같다.
전체적인 내용은 우리가 익히 아는 것과 다르지 않다. 베니스의 거상 샤일록과 소상인 조합의 대표인 안토니오가 인물 갈등의 중심을 이룬다. 위기는 안토니오가 샤일록에게 돈을 빌리게 되면서부터 시작되고, 그 대가는 안토니오의 가슴살 1파운드.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안토니오는 목숨을 구하고 샤일록은 무너지는 결말.
극이 긴장감을 잃지 않으려면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대결 구도에서 어느 한 쪽이 약해지거나 매력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이 부분에선 안토니오를 연기한 유태평양 배우도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상대적으로 샤일록이 너무 강렬했다. 이 부분이 나 역시 조금 아쉬웠다. 공연을 보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내가 가진 개인적인 호감이 작용을 해서 이런가, 아니면 정말로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이 샤일록인 것인가. 최대한 사심을 걷어내고 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도 자꾸만 샤일록에게 눈길이 간다. 도대체 왜.
안토니오와 샤일록의 모습이다. 이게... 의도는 알겠는데 그래도 좀만 덜 화려하게 해주지 싶은 생각이었다. 샤일록의 의상이 정말 너무 멋있다. 무대 구석에 있어도 샤일록만 보인다. 배우 본인의 표현처럼 '무대에 꼿꼿하게 선' 샤일록은 무대 위에 홀로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샤일록은 등장부터 심상치않다. 샤일-록. 샤일-록. 반복되는 구호와 강렬한 사운드가 귀에 박힌다. 극에서 이러한 샤일록 등장곡(?)이 몇 번 반복되는데, 이게 중독성이 장난이 아니다. 캐릭터가 가진 카리스마와 의상과 소품, 분장, 거기에 웅장한 음악과 배우의 연기가 더해지니 이건 뭐 샤일록밖에 안 보인다. 다른 배우들이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 샤일록 몰빵의 느낌이 강했다는 거다.
정의롭고 선하고 용감한 안토니오에게 주어지는 극적 요소들은 다소 평이하다. 의상이나 곡도 무난하고 감정적으로 크게 터뜨릴 씬도 많지 않다. 그나마 감옥에 갖힌 안토니오가 샤일록의 회유에 비난을 퍼붓는 장면이 안토니오가 가장 크게 감정을 터뜨리는 부분이었던 것 같다. 감히 추측컨대, 배우 본인도 이 장면을 가장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내가 느낀 가장 큰 문제는, 결말에 이르러서는 안토니오의 존재감이 완전히 지워져버린다는 것이었다. 재판 장면에서의 대결 구도는 샤일록vs안토니오가 아닌 샤일록vs포샤다. 덕분에 안토니오는 재판 장면 내내 무대 위에 그저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다. 이 와중에도 샤일록의 존재감은 계속되고, 마지막 판결 이후엔 아마도 국립창극단의 [베니스의 상인들]을 본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부정 못할, 가장 인상적이고 폭발적인 무대까지 보여준다.
샤일록이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라버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난 이후, 극은 마무리된다. 동화같은 희망적이고 아름다운 엔딩으로. 그런데 이게 이미 샤일록이 너무 엄청난 무대를 보여주고 난 뒤라, 개인적으로는 그 아름답고 희망적인 엔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샤일록이 보여준 폭발적인 감정과 흥분을 가라앉히고 정리하고 새로운 분위기를 받아들일 준비를 할 겨를이 없었다.
물론 사심이 요만큼도 없었다고는 못 하겠다. 왜냐면 김준수 배우가 잘 했거든. 그것도 너무 잘 했거든. 샤일록의 최후에서는 정말 연기도 노래도, 다 빛이 났다. 누군가가 득음이 무엇이냐 물으면 샤일록의 최후 장면을 보여주면 된다. 광기가 무엇이냐 물으면 그 역시 샤일록의 최후를 보여주면 된다. 그냥 그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창극단 공연 보고 오면 매번 하는 말이지만, 김준수의 진가는 연기를 할 때 드러난다. 연기하는 김준수를 정말 꼭 봐야 한다. 희비극을 가리지 않고 다 잘한다. 근래엔 작품들의 분위기가 주로 비극쪽으로 흘러 역시 정극이 잘 어울리나 생각했는데, 얼마 전 절창을 보며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무대에서 능청을 떠는 것도 보통이 아님을.
김준수에 대한 만족도가 [베니스의 상인들] 작품 전체에 대한 만족도를 훨씬 뛰어 넘는다. 이것 역시 사심인가.... 그치만 작품 자체는 정말 무난무난했다. 실험적이거나 획기적인 시도나 도전이 느껴지는 작품도 아니었고, 사실 연출도 너무 쏘쏘해 보였다.
관대까지 다 보고 나서 생각한건데, 인물들간의 관계가 좀 더 촘촘하게 드러났으면 좋았겠다 싶었다. 샤일록의 수하 중 하나인 마르코가 사실은 소상인들과 같이 어울리다 샤일록에게 넘어간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재판 과정 중 흘러가는 한 마디로 나오고 마는데, 이런 내용을 잘 쪼개 초반부에 보여줬음 어땠을까. 아주 단순하게, 무대를 반으로 나누어 왼쪽에서는 샤일록이 악행을 저지르고 돈만 좇는 모습을 보여주고, 오른쪽에서는 소상인들이 성실하지만 힘겹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다 소상인들 중 한 사람이 선을 넘어 샤일록에게 건너가게 되는데, 알고보니 그것이 바로 마르코였다거나.
안토니오가 샤일록에게 돈을 빌리게 되는 이유는 바사니오의 결혼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인데, 이 때 둘이 주고받는 대화에서 바사니오가 바람둥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한마디가 너무 강했다. 바사니오도, 그런 바사니오를 위해 돈을 빌리는 안토니오도 선뜻 응원하기가 애매해진다. 사랑에 빠진 순수한 청년정도로만 설정했어도 좋았을 걸, 괜히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바람에 인물에 대한 신뢰와 매력이 뚝 떨어져버린다. 포샤에 대한 바사니오의 감정이 진심인지조차 믿기가 어려워진다. 인물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드는 설정을 왜 버리지 못한 걸까.
생각해보니1
마르코가 소상인의 무역선을 침몰시키는 것도, 왜 안 보여줬지? 마르코가 그 과정에서 중요한 증거물을 놓고 오게 된다는 것도 재판에서 말 한마디로 후루룩 끝나버린다. 마르코를 좀 더 잘 썼다면, 그리고 그런 장면들을 살렸다면 극의 스케일이 더 살아났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니2
예전엔 창극단 공연에 무용단원의 협력이 이루어지기도 해서, 안무나 군무가 굉장히 인상적인 작품들도 있었다. 이번 작품은 온전히 창극단 배우로만 채운 것 같았는데, 스케일이나 무대 연출 면에서 인력을 좀 더 풍부하게 활용했다면 좋았게단 생각이 들었다. 해상 공격 장면 같은거, 실루엣만 살려서 무용 같은 걸로 표현했으면 진짜 멋있지 않았을까.
작품 제작 환경같은 걸 하나도 모르니까 이런 소리를 하는 거다. 할 수 있음 다 했겠지.
또 생각해보니3
샤일록이 가진 원작의 설정을 많이 바꿨다고 했는데, 왜 연령대는 그대로 중-장년으로 두었는지 좀 궁금했다. 현대식으로 '재벌 3세' 쯤으로 표현하고 싶었다면, 아주 젊은, 안하무인에 망나니 철부지였어도 좋을 것 같다. 그러니까 그런 터무니 없는 담보(살덩이)도 잡는거지. 애가 그냥 재미로만 사는거야. 세상 무서운 게 없으니까. 칼 들고 막 안토니오 앞에서 지랄을 해. 여기를 벨까? 저기를 벨까? 미친놈처럼 구는 샤일록은 어땠을까. 이게 너무 뻔하다 싶으면 냉철한, 냉혈한 같은 모습도 괜찮겠다. 정중한 척 굴지만 사실은 잔인하고 못된 놈인 거. 젊고 잘생긴 외모로 사람들의 호감을 사지만, 사실은 굉장히 나쁜놈인 그런 거. 이것도 뻔한가. 모르겠다. 그냥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연령대가 비슷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제 손으로 이룬 건 하나도 없는 주제에 돈만 믿고 나대는 샤일록과 성실정의로 똘똘뭉친 안토니오의 대결. 세상 제일 잘나고 똑똑한 줄 알지만 사실 자기가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어서 부하들이 다 하는데, 그래서 최후의 순간에 샤일록은 끝까지 뻔뻔하게 나는 아무 잘못도 없고 다 쟤들이 한 거라고 악을 쓰고 뒹구는 그런 거. 애샛기같은 샤일록 좀 궁금해지네.
감상이 뒤죽박죽 엉망이니 그냥 사심 담은 샤일록 사진이나 몇 개 올려야겠다.
공연 후 관객과의 대화가 있었다. 볼까말까 고민하다 봤는데.
본인이 누군지, 작품을 몇 번 봤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이 장르를 지켜봤는지와 같은 자아표출을 왜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 관대나 GV나 다 똑같다. 본인이 얼마나 이 작품에 애정이 넘치는지, 얼마나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이 작품을 분석하고 있는지, 내가 장르적 지식과 작품 배경 기타 등등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를 뽐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질문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인사 및 작품에 대한 감상 한 마디
ex. 잘 봤습니다, 재미있게 봤습니다, 감동적이었습니다, 짱이예요
질문하고자 하는 대상 지목
ex. 감독님께/배우님께/작가님께 질문하겠습니다.
대상을 지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질문을 받은 사람은 좀 더 집중해서 질문을 듣고 준비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며,
관대 또는 GV에 참여한 전원을 긴장과 부담에서 해방시켜주기 위함이다.
앞에 있는 사람이 여럿인데도 누구한테 하는 질문인지 먼저 말하지 않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간결하고 쉬운 질문 문장
주절주절 중언부언 말고... 특히 '질문 세 가지가 있는데요'와 같이 질문 여러개 만들지 않기... 질문 시간 혼자 다 차지하지 않기...
본인과의 대화 시간이 아님을 명심하기... 앞에 있는 사람한테 말 걸고 싶어서 질문하는 거 하지 말기... 관대는 팬미팅이 아닙니다....
'보다 > 공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40404 | 국립창극단 <리어> in 국립극장 달오름 (0) | 2024.04.05 |
---|---|
20231201 |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in 명동예술극장) (0) | 2023.12.02 |
20230428 | 국립창극단 <절창Ⅰ> (0) | 2023.05.08 |
20230319 | 국립창극단 <정년이> in 달오름극장 (0) | 2023.03.23 |
20230124 | 소크라테스 패러독스 (양동근 소크라테스/치타 멜레토스) (0) | 2023.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