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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이유로 공연을 많이 끊었다. 간간이 보는 거라곤 창극단의 공연 정도인데, 이 공연이 다시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건 도저히 못 끊겠다 싶어 당장 자리를 잡았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처음 본 게 언제더라. 몇 년 전, 한참 공연을 보러 다니던 때에 좋은 작품이라 주워들었거나 그냥 이곳저곳 구경하다 소식을 들었거나 했을거다. 그렇게 우연히 보고 너무 좋아서 매번 올라올 때마다 가능하면 챙겨보고 있는 작품이다. 왜 '가능하면'이나면, 전석매진이 일상인 공연이라 그렇다. 이번에도 늦게 알았으면 내 자리는 없을 뻔 했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
진나라 대장군 도안고는 권력에 눈이 멀어 조씨 가문의 멸족을 자행한다. 조씨 집안의 문객이던 시골의사 정영은 억울하게 멸족당한 조씨 가문의 마지막 핏줄인 조씨고아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자식과 아내의 목숨마저 저세상으로 떠나보낸다. 조씨고아를 아들로 삼아 정발로 키우고 이를 알아채지 못한 도안고는 긴 세월 동안 정영을 자신의 편이라 믿고 정발을 양아들로 삼는다. 그렇게 20년이 지나고 정발이 장성하자 정영은 참혹했던 조씨 가문의 지난날을 고백하며 도안고에 대한 복수를 부탁하는데... |
국립극단 공홈에서 제공하는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시놉시스다. 이것만 보면 딱히 특별하거나 재미있을 게 없다. 심지어 자신의 아이를 희생시켜 조씨고아를 대신 살리는 정영의 행동이 쉽게 납득이 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조씨고아는 애초에 정영의 행동에 대한 이해나 납득을 바라는 극이 아니다. 그냥 일련의 사건들과 정영의 삶 자체를 가만히 보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되게 슬퍼지고, 허무함과 부질없음에 그저 눈물만 난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 순식간에 어디까지 갈 지가늠하기도 힘든 거대한 사건에 휘말려 정신없이 휘말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정영의 삶이 너무너무 서글프다.
오랜만에 보기도 했고 원래도 기억력이 좋지 않은 편이라, 방심하고 있다가 1막에서 아주 혼쭐이 났다. 휴지를 미리 준비했어야만 했다. 정영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들을 모두 잃고, 오직 하나, 조씨고아만 남게 되는 과정이 1막에서 휘몰아친다. 그 과정에서 정영을 도와주는 사람들은 결국 모두 죽음을 맞게 되는데, 이들때문에 쏟는 눈물이 한 바가지다.
공주님, 까르르까르르 할 줄만 알던 사람이ㅠㅠㅠㅠㅠㅠㅠㅠㅠ
한궐 장군, 웃기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를 울려? ㅠㅠㅠㅠ
공손저구 선생도 아주 진짜 너무 못됐다. 조씨고아를 키워달라니, 자기더러 90살까지 살란 말이냐며 정영을 나무라고 자기는 차라리 쉬운 걸 하겠다며 죽음을 자처하고ㅠㅠㅠㅠㅠㅠ
그리고 1막의 압권은 누가 뭐래도 정영의 처다. 제정신으로는 버틸 수 없는 순간순간들이 너무 와닿아서 정말 내내 울었다.
조씨고아 1막은 뭐라 말로 표현을 못 하겠다. 그냥 다 안타깝고 안타깝다. 그리고 다 너무 대단하고 엄청나다. 인물 하나하나가 다 연기로 관객을 압도한다. 요즘 말로 연기차력쑈, 그거다.
그리고 2막은 정영이 아주 나를 ㅠㅠㅠㅠ 정영이 ㅠㅠㅠㅠ 사실 정영은 1막에서도 엄청난데 서사를 만들어가는 다른 인물들이 여기저기서 막 존재감을 뽐내서 다같이 숨도 못 쉬게 나를 몰아붙이는 느낌이라면, 2막은 정영 혼자 극을 다 채우는 느낌이다. 스무살이 된 조씨고아에게 두루마리를 보여주며 그간의 일들을 빠르게 풀어내고, 결국 조씨고아를 각성시키고 복수까지 마무리가 되는데, 문제는 이 일련의 일들의 중심에는 정영이 없다. 그 세월을 버텨오고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정영인데, 정영에게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상이랍시고 받게 되는 12마지기의 땅이 무슨 소용이라고. 마치 모든 것이 해결되고 평화와 행복이 찾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도 정영의 몫은 없었다. 그 허망함을 어떡하면 좋아 정말 ㅠㅠ 마지막 순간, 그야말로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20년 전의 인물들 사이에서도 정영은 외롭고 괴롭다. 아이를 안고 나온 정영의 처는 끝내 정영을 외면한다. 그럴만도 하지, 당연하지ㅠㅠ 하는 마음과 정영도 불쌍한데 좀 봐주지ㅠㅠㅠㅠ 하는 마음이 동시에 든다.
조씨고아 진짜, 정말, 너무, 아주, 많이, 굉장히, 엄청나게 좋다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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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저구 역의 정진각 배우님의 딕션과 발성이 진짜 놀라웠다.
뭐 하나 흐트러짐이 없다. 진짜 대단하셨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했더니 매체도 매체인데 <태>를 하셨더라.
오태석의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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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이랑 정영의 처는 각각 다른 느낌으로 너무나 대단했다. 너무 멋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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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웅 배우님은 진짜 못 알아봤다. 내가 <염쟁이 유씨>를 몇 번을 봤는데. 하. 참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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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인물들의 연기차력쑈가 정말 장난 아니다. 이건 몇 번을 말해도 다 표현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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