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너무 예쁘게 만들었다. 그래서 자꾸 눈에 띈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를 흥미롭게 보긴 했지만 더 찾아봐야겠단 생각을 하진 않았었는데, 서가를 지나가다 또 눈에 띄고 말았다. 그리고 제목 좀 봐. 그냥 지나칠 수가 없게 생겼잖아.
죽은 등산가의 호텔
/ 아르카디 스트루가츠키 ,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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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형제의 작품이 쉽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던 터라 작품 설명을 먼저 봤다. 근데 장르가 추리래. 오? 벌써 재미있는 것 같다? 뭔가 부담이 확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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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덮인 외딴 호텔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마침 휴가를 즐기러 와 있던 경찰(페테르)가 엉겁결에(나는 그렇게 느꼈다) 사건을 수사하게 된다. 근데 경찰이라고 다 살인사건 수사하는 경찰은 아니잖아. 페테르는 횡령, 사기 뭐 이런 쪽을 수사하던 경찰이었다. 그래서 수사 과정에서 자기가 포와로 같은 탐정도 아니고! 하면서 괴로워하기도 한다. 작가들 나름의 유머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사람들을 신문하고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데...
이거 결말을 함부로 얘기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정도로 놀라운 결말이라면, 내가 아무리 기억력이 좋지 않아도 잊어버리지는 않을 것 같다.
호오가 엄청 갈릴만한 결말이다. 나는... 음... 오는 아니다. 근데 이게 작가들의 성향을 조금 알거나 전작을 하나라도 봤다면 이해 가능한 범위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일 수 있는데, 생판 모르는 상태에서 보면 아닐 가능성이 더 클 것 같다.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후기 中
우리의 구상대로라면 독자는 소설 속 사건을 처음부터 평범한 '밀실 살인'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러다가 전통적인 추리소설에서 사건의 설명이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흥미의 저하를 유발하는 끝에 가서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을 목격해야만 했다. 이 반전이란, 하나의 이야기 줄기가 뚝 끊어지고 완전히 새로운 줄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새 줄기는 그 자체로 흥미로우며 완전히 다른 주제와 다른 문제를 보여 주어야 한다. 심지어 등장인물이 달라질 수도 있다...
(중략)
이제 소설의 제목은 『살인 사건, 추리 장르에 바치는 또 하나의 임종 기도』가 되었다.
소설을 다 읽고 보리스의 후기를 보면 읽으면서 느꼈던 아리송함, 의아함, 놀라움 같은 것들이 되게 명쾌해진다. 작가의 의도가 이렇게 잘 맞아떨어질 수 없는 작품이다. 심지어 그들이 정했던 원래의 제목마저도, 의도에 부합하고 작품을 아우른다. 이 사람들 진짜 재미있고 놀라운 사람들이네,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작품도, 작가도 굉장히 매력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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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를 넘나드는, 어찌보면 무모하고 위험한 선택을 한 셈인데 그 끝이 우습지 않다는 것이 대단한 것 같다. 이야기가 망가졌다거나 허무맹랑한 헛소리로 느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대단한 거 아닌가. 그리고 그들이 원래 해 왔던, 늘 해 왔던 뉘앙스(외계인!)가 느껴져 이 모든 이야기가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세계관으로 수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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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신속하게 핵심을 정리해 보자. 힌쿠스가 위험한 악당에 미치광이 사디스트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어떻게든 힌쿠스에게 그런 누명을 씌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이 가짜 가방은 뭘까...? 좋아, 이 문제는 나중에 생각해 보자. 이 시계와 권총을 어떻게 한담? 이 물건들을 압수하고 힌쿠스가 도둑이라면(악당까지는 아닐지라도), 그는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빠져나갈 것이다.... 누군가 이 물건들을 그의 짐에 몰래 넣어 둔 거라면... 젠장,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경험이 부족하다. 내게도 에르퀼 푸아로 같은 경험이 있다면... 시계와 권총을 압수한다고 쳐도 어디에다 두지? 몸에 지니고 다니나? 그랬다가는 도둑으로 몰릴 텐데... 물론 내 방에 숨길 수도 없다...
자신이 에르퀼 푸아로가 아니라는 사실에 괴로워하는 페테르 ㅋㅋㅋ
그런데 이 남자와 이야기를 나눈 후로 내내 나의 무의식에서는 모종의 기계가 소리도 없이 돌아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순간적으로 말도 안 되는 생각이 퍼뜩 떠오른 것을 보면 말이다. 어쩌면 올라프가 올라프가 아니고 힌쿠스라면... 또 힌쿠스는 힌쿠스가 아니라 올라프라면.
페테르가 한창 머리를 굴릴 때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 역시 열심히 추리를 쫓아가고 있었지....
"모제스는 아무 죄도 없어요. 여기 상황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게 꼬였어요, 경위님."
"흡혈귀 이야기만은 제발 하지 마세요."
나는 금고 옆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당부했다. 시모네가 웃음을 터뜨렸다.
"흡혈귀는 없어요. 오컬트가 아니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SF였죠. 모제스는 인간이 아니에요, 경위님. 우리 주인장의 생각이 결국 옳았어요. 모제스와 루아르비크는 지구인이 아니라고요."
"그러면 금성에서 왔겠군요."
내가 알 만하다는 듯 말했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금성일 수도 있고, 다른 행성계일 수도 있고, 이 우주에서 이웃한 공간일 수도 있죠... 이 부분은 저도 확실히 말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지구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제스는 지구에 온 지 꽤 되었어요. 1년이 넘었죠. 약 한 달 반 전 범죄단의 손아귀로 떨어졌습니다. 그들은 모제스를 협박했고 끊임없이 위협했어요. 천신만고 끝에 범죄 조직을 빠져나와 이곳으로 도망친 겁니다. 루아르비크는 말하자면 조종사인데, 수송을 담당해요. 여기에서 저기로. 그들은 어제 자정에 이곳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어제 10시에 사고가 일어났어요. 기기가 폭발을 한 모양이에요. 그 결과 눈사태가 일어났고 그 바람에 루아르비크는 직접 걸어서 이곳까지 와야 했던 거죠...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경위님. 이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범죄단이 경찰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한다면 분명히 그들을 살해할 겁니다."
"우리도 같은 신세가 되겠죠."
내가 말했다.
"그럴지도요."
그가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이건 우리의, 지구인들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외계인들이 살해되도록 내버려 둔다면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겁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울적하게 생각했다. 이런, 이 호텔에는 미치광이들이 너무 많아. 그런데 당신마저 미치광이라니.
너무 큰 스포라 일단 가림. 근데 이 와중에도 페테르는 콧방귀를 뀌는 태도로 일관한다.
근데, 그럴만 함. 나는 페테르 편임.
"경위, 당신은 믿으실 수도 아닐 수도 있겠죠."
모제스가 이야기를 마쳤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꼭 기억해주기를 바라오. 우리에게는 단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소. 하나는 당신이 우리에게 배터리를 넘겨주는 거요. 그러면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노력할 것이오. 다시 말하지만, 이 경우 당신의 동포에게 발생한 손실은 모두 완전히 보상받을 거요. 또 한 가지는..."
그는 잔을 홀짝였다.
"제발 이해해주시오, 경위. 나는 당국의 손에 산 채로 잡힐 권한이 없소이다. 그것이 나의 의무라오, 아시겠소. 나는 우리 두 세계의 미래를 걸 수는 없소. 이 미래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오. 나는 실패했소. 하지만 내가 당신의 지구에 온 최초지만 마지막은 아닌 관찰자요. 이해하시겠소, 경위?"
이것도 스포라 가림.
근데 저 의미심장한 말이 너무 멋있고 좋았다. 최초지만 마지막은 아닌 관찰자.
〔신이 되기는 어렵다〕 생각도 나고 말이야.
그랬다. 그들은 잘못된 때에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는 그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도 그럴 준비가 안 되었다. 그 모든 일을 겪고 수도 없이 반추했던 나조차도 지금 또 비슷한 상황과 마주치면 제일 먼저 이렇게 자문할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가 사실일까. 뭔가 숨기고 있지 않을까. 그들의 출현에 거대한 재앙의 씨앗이 숨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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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등산가의 호텔〕을 빌릴 때 〔노변의 피크닉〕도 볼까 말까 고민하다가 하나만 빌렸었다. 잘 안 읽히는 걸 끌어안고 있다간 하염없이 책과 멀어질 수도 있어서. 그래서 일단 덜 어려워보이는, 추리소설이라고 하는 〔죽은 등산가의 호텔〕을 먼저 보고 판단하자 했는데 이걸 너무 재밌게 봐서 〔노변의 피크닉〕도 봐야만 하게 생겼다. 나도 내가 이럴 줄은 몰랐다.
20260601 | 신이 되기는 어렵다 HARD TO BE A GOD / 아르카디 스트루가츠키·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표지와 제목만 보고 맘에 들어 찍어뒀던 책이다. 도서관 갈 때마다 볼까 말까 고민하다 큰 맘 먹고 빌려왔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HARD TO BE A GOD/ 아르카디 스트루가츠키·보리스 스트루가츠키 ■
karangkara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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