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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갈래?
반납할 책이 있어 도서관에 가야 했다. 가끔 함께 가주는 일령이에게 물었더니 오늘은 할 게 많아서 안되고, 내일은 한 번 생각해 본다고 한다. 그래. 그럼 내일 다시 얘기할게. 그렇게 하루를 기다렸다.
다음날이었다. 일령이가 나를 보자마자 먼저 도서관에 가자고 한다. 신이 난 얼굴이다. 하루 사이에 적극적이 된 게 신기해서 웬일이냐 물어보니, 목표가 생겼다고 했다. 한달 동안 5권의 책을 읽으면 상점 1점을 받는데, 그걸 노릴거란다. 그러면서 벌써 이번달 계획까지 줄줄 읊는다. 집에 책이 뭐뭐가 있고, 이건 어디까지 읽었고, 이거 저거를 읽고 어쩌고. 도서관까지 거리가 꽤 돼서 혼자 오가기엔 가끔 좀 귀찮고 번거로울 때가 있는데, 함께 가준다면 나야 완전 땡큐지.
평일은 8시까지만 책을 빌릴 수 있어서, 말 나온 김에 얼른 저녁을 먹고 바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약 30분 정도 걷는 동안 일령이랑 많은 대화를 나눴다. 기술 선생님과 체육 선생님이 재미있고, 일령이는 수학 선생님도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또... 뭔가 많이 얘기를 했는데.. 기억이 안 나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도서관에 도착했다. 그런데.
휴실기간에 딱 걸려버렸다. 문자로 공지도 받았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일령이에게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조카님이 어려운 걸음을 해주셨는데 하필 공사중이라 책을 못 본다니. 책을 못 빌린다니! 그런데 일령이 반응이 의외로 산뜻하다. 괜찮다고 하는데 괜히 더 불안하다. 나한테 엄청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너 맨날 나 구박하잖아...?
요 앞에 카페나 가자.
이거였다. 가끔 도서관에 함께 가면 그 앞에 있는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곤 하는데, 일령이가 유독 이 카페를 좋아했다. 아쉬운 마음은 맛있는 음료로 달래기로 하고 카페에 갔다. 일령이는 요새 커피에 맛을 들였다. 아직 어린이에 가까운 청소년이라 한잔을 다 마시는 것은 말리고 있어서 안 된다고 한 번 튕겼다가, 에잇 모르겠다 하고 그냥 먹고 싶은 걸 시키라고 했다. 완전 커피에서 커피가 첨가된 음료로 합의가 되었다. 카페인은 도긴개긴도찐개찐일 것 같았으나 오늘은 그냥 넘어가는 걸로.
이대로 집에 가기엔 아쉬워서 슬쩍 물었다. 여기까지 나왔으니, 서점 구경이라도 하고 갈까? 나는 거절당할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일령이는 흔쾌히 받아들인다. 웬일이지, 얘가 정말?
음료를 다 마시고 동네 서점까지 조금 더 걸었다. 일령이가 갑자가 생각난 듯, 마침 사야 할 문제집이 있다고 했다. 잘 됐다 하며 동네 서점으로 향했다. 들어서자마자 청소년 도서 매대로 발길이 향한다. 이미 읽은 책도 있고 관심을 갖고 있는 책들도 있다고 했다. 이것저것 구경하다 일령이는 일단 문제집을 찾으러 가고 나는 나대로 책 구경을 하러 다녔다.
문제집을 다 고른 일령이가 자꾸 내 쪽으로 와서 기웃거린다. 너는 알아서 구경해. 혼자 구경을 다니다 내 근처에서도 기웃거리기에 그런가보다 했는데 갑자기 두툼한 책을 하나 가지고 와서 보여준다.
이거 재미있어 보이지 않아요?
문제집을 함께 구경하다 중2 과정에서 세계사를 배운다는 얘기가 나왔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세계사를 미리 해두는 것도 좋다고 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세계사 문제집을 몇 개 구경하면서 놀기도 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문제집도 아닌 세계사 책을 들이밀 줄은 몰랐지. 나름 내용도 살폈는지 이런 책에다가 줄도 치고, 필기도 하면서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며 설렌 표정을 짓는다. 일령이는 필기하는 걸 좋아한다. 누가 시키는 거 말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필기하는 거. 그래? 그럼 사줄게. 안 될 이유가 없지. 그러고 나는 계속 책을 구경하는데 일령이는 몇 번이나 오가며 살까 말까 고민을 한다.
사고 싶은데. 재미있어 보이는데. 근데 내가 정말 할까?
의욕만 앞서 실천 불가능한 일을 저질러버리는 것은 아닐지 깊은 고민에 빠진 것 같았다.
그래? 그럼 좀 더 생각해 보고 사든지. (무심)
이쯤부터 일령이는 약간 소리없는 절규 단계로 들어섰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는 소리만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책 구경함은 아니고 사고 싶으면 사라고 했다. 책이 좀 두껍고 내용이 방대해서 고민하는 것 같길래, 이런 건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을 생각하면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목차를 보고 관심이 가는 걸 먼저 보거나 책이나 방송 같은데서 접한 얘기를 찾아보는 식으로 읽어도 괜찮을 거라고 했다.
잠시 후 일령이는 결연한 얼굴로 통세계사 1권을 품에 안고 나에게 다가왔다.
나 이거 살래.
그리고 나를 잡아 끌었다. 나는 아직 책 구경 중인데 자꾸 나보고 노트를 보러 가자고 했다. 필기 할 노트를 사고 싶다고 했다. 아니 나는 구경.. 좀 더 보고 싶... (끌려감)
결국 통세계사 전용 노트도 하나 샀다. 일령이는 신이 났다. 이런 걸 좋아하는 아이라니. 가끔 보면 좀 신기하다.
그날 밤 웬일로 일령이가 먼저 카톡을 보내왔다.
뭐야...
얘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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