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추천을 보고 얼른 빌려왔다. 요즘 도진기 작가의 작품읽기에 한창 빠져 있어서.
합리적 의심 / 도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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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법정 소설이다. 앞서 보았던 〔4의 재판〕과 비슷한 결인데, 〔합리적 의심〕이 그보다 훨씬 먼저 나온 것이었다. 순서를 굳이 따져가며 읽지는 않아도 될 것같고, 둘 다 읽으면 닮은 듯 다른 점을 찾게 되는 게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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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의심〕은 판사가 주인공이다. 세간의 관심을 모은 사건의 맡으면서 1심 판결을 내리기까지의 과정과 판사 세계에 대한 여러 고민과 성찰과 불만과 회의를 역시나 담아내면서, 끝에 가서는 '소설'적 면모도 과감히 드러낸다. 〔4의 재판〕이 형사 재판과 민사 재판을 나누어 설명하고 가상의 사건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좀 더 실용적으로 설명하는 글이었다고 하면, 〔합리적 의심〕은 민사 재판을 소재 정도로 다루며 소설적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도구로 활용한다. 〔4의 재판〕은 거의 법 교양서에 가깝다고 느껴질 정도였는데 〔합리적 의심〕은 이 뒷부분의 이야기때문인가, 소설에 가까운 느낌을 주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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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죄가 분명한 살인사건이 있다. 판결은 사건을 맡은 부장판사와 배석판사 2인의 합의로 이루어지는데, 비공개로 이루어지는 이 합의에서 무죄로 판결이 기운다. 이 판결 과정에서 책의 제목인 '합리적 의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주인공인 부장판사가 선고에서 돌발적으로, 유죄를 선고한다. 그 뒤로 소설적 파장들이 이어진다. 항소에 항소를 거듭한 피고는 무죄를 확정받고, 피해자 가족의 슬픔에 공감한 주인공이 넌지시 민사 재판을 알려주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무죄 판결을 받은 피고로부터 판사가 협박을 받는 지경에 이른다. 그 뒤로 이어지는 불안의 나날들. 그래도 나름 판사라고(?) 대응책을 찾아 협박범을 찾아간다. 그리고 다음날의 신문에는 뺑소니 사고로 사망한 협박범의 기사가 뜬다.
설마설마하게 만드는 전개다. 판사라는 사람이 설마 뺑소니...? 이거야말로 '합리적 의심'일 뿐 증거는 없는 상황이다. 아무튼 이래저래 불안의 씨앗은 제거된다.
그런데 이번엔 그 강직하고 올곧던 주인공의 변화가 뒤통수를 친다. 법의 시스템에 따라 무죄를 판결했어야 했지만 자신의 고집과 독단으로 유죄를 판결하고 받은 심적 고통이 너무 컸던 나머지 그렇게 비판하고 질색하던 범의 시스템 안으로 조용히 스며든다. 무죄 판결을 내리고 주인공은 혼자 속으로 되뇐다. 살인자가 확실하다고.
뺑소니 사건 역시 나중에 술술 다 풀어준다. 이 후반부의 이야기가 이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어주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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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판사라는 직업에 대한 고민과 그 시스템에 얼마나 염증을 느꼈던건지 모르겠다.
"유죄로 써."
"네?"
난 눈을 들었다.
"유죄야. 뭘 판결문 쓰기도 귀찮게 무죄를 써. 양형에 차이도 없잖아."
유죄 판결문은 검사의 공소장 중 범죄사실 부분을 거의 그대로 가져오고, 법령 몇 개만 첨부하면 되니 간단하다. 반면 무죄 판결문은 검사의 주장을 일일이 배척해야 하니 그 품은 열 배, 스무 배다.
"난 일 년 동안 무죄 판결 한 번도 안 쓴 사람이야! 정 그렇게 고집 피우면 내가 변호사한테 전화해서 잘 봐준다 하고 무죄 주장 철회시키면 그만이야!"
내가 폭발한 건 그 순간이었다. 무죄 판결 한 번도 안 쓴 게 자랑이라고? 당사자는 억울한 심정에 눈물을 떨구며 글을 써내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항변했을 텐데, 이 사람한테는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했다는 말인가? 도대체 얼마나 오만방자하면 같은 판사 앞에서 변호사와 거래해 사건을 처리하겠다는 소리를 당당히 꺼낸단 말인가? 이 사람은 선배도 아니고, 동료도 아니다. 아니, 심지어 판사가 아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에게 동조하면 나도 판사가 아니게 된다.
만약 내가 재판했더라면 조두순은 살아서 바깥의 공기를 마시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왜 이렇게 형이 낮았을까를 생각해보면, 우선 술에 취했다는 이유로 형을 감경했다는 문제가 있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판사의 안이함이었을 것이다. '살인이 12년인데 이 건은 이 정도로 하지' 하는. 피해자에 대한 공감도, 사건의 개별성에 대한 성찰도 없는 관행대로의 판결. 해오던 대로의 사건 떼기. 그 판결은 결국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법감정에 한참 못 미쳤고, 큰 파장을 남겼다. 오랫동안 매뉴얼대로 판결이라는 제품을 찍어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이 달라졌고 매뉴얼도 낡아버린 것이다. 지금은 동종 사건에서 훨씬 형이 올라가 있는데, 나는 물론 이쪽에 찬성이다. 결과의 단순 비교보다 '악성'에 등급을 매겨야 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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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가 아닌 법정물이라 긴장감이나 몰입감은 조금 떨어질 수 있다. 그래도 판결이라는 게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판사들이 어떻게 판단하고 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흥미가 있다면 〔합리적 의심〕 도, 〔4의 재판〕도 굉장히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거기에 노골적으로 담긴 작가의 법체계 극혐 마인드를 느껴보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다.
20260427 | 4의 재판 / 도진기
다 읽고 보니 25년 말에 나온 따끈따끈한 최신작이었다. 장르도 모르고 그냥 가져 왔는데 추리가 아니라 법정 소설... 이라기엔 좀 작가의 회한이 담긴? 자전적인? 느낌이 드는 소설이었다. 4의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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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만 자꾸 직원의 친절을 아, 저 사람이 내 아내였으면, 하고 생각하는 건 좀 그랬다.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해두긴 하는데, 그것도 좀 세상물정 모르는 판사님같구. 이성의 다정함에 약해지는 이유가 사별한 부인에 대한 트라우마임을 몇 번이고 밝히긴 한다. 그래요, 그렇다고 해 둡시다, 하는 마음으로 읽긴 했는데 이런 부분에서는 작가가 좀 더 섬세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무리 속마음이라고 해도, 상사에게 베푸는 사회적 예의이자 친절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뉘앙스를 줄 필요는 없다. 내가 그러고 싶어서 상사한테 웃어주고 필요한 거 없냐 물어보고 안색이 좋네 안 좋네 하는 말도 가끔 하고 그러는 거 아니거등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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