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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27 | 4의 재판 / 도진기

카랑_ 2026. 4. 28.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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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고 보니 25년 말에 나온 따끈따끈한 최신작이었다. 장르도 모르고 그냥 가져 왔는데 추리가 아니라 법정 소설... 이라기엔 좀 작가의 회한이 담긴? 자전적인? 느낌이 드는 소설이었다. 

 

 

4의 재판 / 도진기

 

 

 

 

 

재미가 있냐 없냐로 따지면 나는 재미 없다 쪽이다. 작가 후기에서 이 글이 재미를 잃지 않았기를 바란다고 하는 걸 보고 내가 괜히 뜨끔했다. 유익했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했을텐데 재미있었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 못할 것 같아서. 그게 좀 미안해서.

 

 

필리핀으로 여행을 간 송지훈과 배양길. 여기서 송지훈이 급사하게 되고, 배양길은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다. 소설은 송지훈의 여자친구인 한선재의 시점으로 펼쳐지고, 배양길에 대한 살인 재판과, 그 이후에 진행되는 보험금 소송을 거치는 이야기이다. 가슴 벅차는 정의나 통쾌한 반전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혐의가 명백해 보이는 살인 사건임에도 재판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 수 있는지, 얼마나 억울한 지경에 이를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느낌이었다.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기 위한 가상의 사건을 두고 전후반부로 나누면 앞쪽의 형사재판과 뒤쪽의 보험금 소송으로 나누어지는데, 일반적인 소설이라면 둘 중 하나라도, 혹은 둘 모두 정의가 승리하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하고 그렇게 되리라 기대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그런데 이 소설은 철저하게 현실적으로 간다. 미어지는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재판에서는 지고 말고, 노린 것이 뻔한 보험금 소송에서도 속수무책으로 지고 만다. 대한민국 사법부에게 처절하게 당하고 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앞서 말한 작가의 회의같은 게 강하게 느껴진다. 이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고민은 엄청 했던 것 같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기 보단 현 사법체계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알려주고 싶어하는 느낌이었다. 픽션보단 팩트에 비중을 둔 것 같은. 

 

 

그래서 법조인 출신으로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는 이런 내용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형사재판과 민사재판은 논리 구조가 다릅니다. 형사재판에서는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이라는 기준이 있어요. 이 사람이 무죄가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면 유죄판결을 해선 안 된다, 다시 말해 의심이 들지 않는 수준까지 입증이 이루어져야 유죄로 할 수 있다는 원칙입니다. 범인을 놓칠지도 모르지만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는 말자는 거죠. 그래서 형사재판에서는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할 정도의 입증을 요구하게 됩니다. 

 

 

 하지만 민사재판은 다릅니다. 양쪽이 다투는 구조잖아요. 둘 중 하나는 어떻든 이기게 해줘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둘 중 나은 쪽이 이기는 겁니다. 증거가 완벽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상대방보다 낫기만 하면 되죠. 그거면 충분합니다. '증거의 우월'이라는 기준입니다. 그래서 형사재판과 민사재판은 결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단순화해서 예를 들어보죠. 대략 70퍼센트의 증거만 있는 사건이라고 해보겠습니다. 100퍼센트 가까운 증거를 요구하는 형사재판에서는 증거 부족으로 무죄를 받을 겁니다. 하지만 민사재판에서는 승소하죠. 30퍼센트의 증거를 가진 상대방보다는 우월하니까요. 

 

 

 이 사람이 살인죄로 형을 살지는 않는다 쳐도, 보험금을 받는 게 맞는 걸까? O.J.심슨이 형사에서는 무죄를 받았지만 민사에서는 살인이 인정되고 배상 명령을 받았다던데, 우리는 왜 이렇지? 캄보디아 사건이건 금오도 사건이건 심슨 사건보다 증거가 더 많으면 많았지 덜하지는 않은 거 같은데? 심지어 심슨 사건에선 미식축구 슈퍼스타를 파산시킬 만큼의 거액 배상을 지우는 재판이었는데도 살인을 인정했잖아. 반면에 우리 보험금 재판은 횡재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인데, 다시 말해 기각된대도 본전인 재판인데, 그렇다면 살인을 인정하는 허들도 더 낮아져야 하는 거 아니야? 이 지경인데도 아예 살인이 아니라고 해주면서까지 돈 보따리를 안겨주는 게 맞는 거야? '살인자일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돈을 주려면 조금은 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미국 법이 잘못되었고, 우리 법이 옳은 걸까? 우리나라 재판이 미국보다 나은 걸까? 우리가 다른 분야는 못 미치면서 유독 사법부만 훌륭해서 미국을 뛰어넘은 걸까? 

 

 

 지훈의 죽음과 살인 재판, 보험금 소송 ... 모든 절차는 어떤 규칙에 따라 진행되었고, 끝이 났다. 지켜진 건 규칙뿐, 정의는 아니었다.

 

 

 법은, 재판은 결국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을까? 분쟁의 종식, 시끄러워지는 걸 막는 것...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법이 정작 관심 있는 건 '지킨다'는 것에 있었다. '규칙'을. '질서'를. 그들의 '체면'을.

 

 

작가가 판사 출신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가, 판사의 역할에 대한 고민과 비판도 많아보이고, 이래저래 사법 체계에 질려버린 듯한 느낌도 들고, 한편으론 그래서 흥미롭기도 했다. 사법 체계의 한계, 관행같은 것에 염증을 느끼고 견디다 못해 그 세계를 뛰쳐나와 자신이 속했던 세계를 비판하거나 풍자하고 실상은 이렇다!하고 까발리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안타까워서 어떻게든 알려주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막판에 나는 사적복수가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철저하게 현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마지막엔 비현실로 뛰어들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사건이 벌어졌던 필리핀으로 배양길을 불러들이고, 그곳의 법으로 다시 재판을 벌이고, 결국은 처벌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일사부재리 원칙으로 국내에서는 더이상 어떤 방법도 쓸 수 없다면, 국내법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해외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다만 이건 사건 자체가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한번 더 움켜쥘 수 있는 지푸라기였던 거고, 국내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면 역시나 허무하게 끝이 날 수밖에 없긴 했겠지. 

 

 

재미는 없었어요 ^^;;;;;; 하지만 유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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