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태기...라기보단 다른데(덕질) 정신이 팔려서 책에 손이 잘 안 가는 시기다. 근데 일정상 책을 잠깐 보면 좋을만한 시간이 생겨서 이때다! 지금이 바로 나의 독서 부채감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는 때다!! 하고 얼른 도서관에 갔다. 다른 거 없고 무조건 얇은 책, 짧은 책만 찾았다. 내용도 작가도 장르도 다 필요없고 무조건 얇.은.책.
지옥 / 가스파르 코에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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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무조건 얇.은.책.으로 골라든 게 네 권. 그 중에서도 《지옥》은 세 번째로 두꺼운 책이었다. 판형이 작긴 해도 얇은 건 아니었는데 이 알록달록하고 귀여운 표지와 제목과 책 소개에 홀려버렸고... 왠지 잘 읽힐 것 같이 생겼잖아, 표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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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잘 읽힌다. 70대에 사망한 경제학 교수가 도착한 사후세계. 간단한 절차를 거쳐 도착한 곳은, 아마도 천국이리라. 돈은 마음껏 써도 청구되지 않고, 재화든 서비스든 무엇이든 원하는 걸 살 수 있는 세상. 그리고 쉴 새 없이 가고 싶은 곳을 정해 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니는 곳. 그래서 장소의 이동은 공항에서 공항으로 이루어진다. 처음엔 좋아보였지만, 여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공항에서 공항 간 이동은 가능하지만 공항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다. 예를 들자면, 대한민국 서울을 정해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이제 다음 여행지를 정하고 출국 수속을 하라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다. 공항 안에서 모든 재화와 서비스는 제공되지만 딱 거기까지다. 계속해서 이동하고, 소비하는 삶. 주인공은 깨닫는다. 아, 이곳은 천국이 아니구나. 지옥이구나.

시간의 제약이 사라지면 초조함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그것이 아무리 지루하다 해도, 사람들은 현재의 흐름에 자신을 맡길 수 있다. (...) 수많은 해와 수많은 세기의 흔적은 모조리 지워졌는데도 지옥에서의 나의 삶은 24시간이 칼같이 쪼개져 있었다. 초조함은 절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들이 짊어지는 짐이었다. 그리고 이 지옥에서는 제아무리 지루하고 반복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늘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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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본인이 살아온 삶을 반추한다. 나는 한치의 부끄럼없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기껏해야 남들도 할만한 작고 개인적인 비밀같은 걸 제외하고는 범법행위는커녕 도덕적 윤리적으로 어긋난 삶을 살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자신이 사후세계의 시스템 오류로 천국이 아닌 지옥으로 잘못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지극히 현실적이고 종교는 믿지도 않던 경제학 교수가 신과의 면담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정말 큰 결심을 하고 내린 결론이었지만 안 되죠. 신 없죠. 신은 우리 모두(관리인)라는 말에 좌절하고.
* 관리인: 공항과 사후세계 시스템을 보조하고 관리하는 빨간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 주인공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를 상냥하게 고문하기 위해 대량으로 만들어진 이 가련한 악마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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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옥공항을 끝도 없이 오가며 시간은 흐르고, 적응이란 점점 더 단순하고 멍청해지는 것으로 이루어지는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우연히 스치는 인파 중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는 노인을 만나게 되는 주인공. 아들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이 지옥공항 탈출을 꿈꾸게 되는 주인공. 그렇게 여차저차해서 이곳을 탈출하는 방법은 결국 죽음뿐인가? 해서 죽음을 시도하기도 하고 아무튼 그러다가 이 시스템의 허점(?)을 찾아내 결국 탈출에 성공한다. 그렇게 당도한 곳이 천국.
| 그곳을 통해 우리는 밖으로 나와, 별들을 다시 보았네. <신곡> 제34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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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공항을 경험하는 동안 주인공은 간간이 자신이 생전 발표한 논문과 이론들이 지옥공항의 시스템에 적용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생전에 자신이 구상하고 주장하고 옳다고 여긴,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환경이 자신의 사후세계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지옥인거지.
| 나는 사는 동안 내게 주어진 수십 년을 허비해버렸다. 가정 생활에서나 학교에서나 내 주변 사람들과의 교류를 차단하고 살았다. 인간의 모든 충동적 행위를 철저하게 배제하면서 나의 지출을 비롯해 나의 경력, 나의 친교까지 꼼꼼히 따져가며 편집증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나는 이런 냉정한 공리주의를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나의 연구 논문에, 결국에는 다른 이들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전파했다. 초원에 흐르는 시냇물을 좋아했으면서도,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어떤 정신의 혼란과 지적인 열망 때문에 나는 내가 지나는 길에 대형 쇼핑센터를 널리 퍼트려놓았다. 나는 충동을 억누르느라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했고, 그 바람에 나의 창조성은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나는 내가 구축해놓은 세계를 저주하면서 또 다른 즐거움을 맛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어설프고 막연하게 나만의 오두막을 만들었다. 나는 사랑을 몸소 경험하려 하기보다 그 허상에 탐닉했다. 죽음을 맞고서야 나는 나의 위선을 마주했고 내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독배의 찌꺼기까지 모조리 다 들이켤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그것은 심지어 형벌이 아닌 그저 당연한 결말이었다. 죽음을 맞이하면서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를 어떻게 책임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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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히기도 하고 상상력도 기발했던 것 같고, 그리고 철학자이자 정치가라는 작가의 사상도 느껴져서 흥미롭고 재미있긴 하다. 이거 보면서 얼마 전에 읽은 《시간을 팝닌다, T마켓》도 생각났다. 소설의 형식을 빌려 경제론을 재미있게 들려주는 이야기였는데, 《지옥》도 소설의 형식을 빌려 독자에게 정보와 깨달음을 주려는 의도가 좀 더 강해보여서. 다소 직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20250917 | 시간을 팝니다, T마켓 / 페르난도 트리야스 데 베스
얇고 알록달록해서 눈에 띄었다. 별로 선호하는 표지 디자인도 아니었고, 제목도 너무 가벼워보였는데 이상하게 손길이 갔다. 희한하네. 그냥 가볍게 한번 볼까? 하고 시작했는데 이거 의외로
karangkara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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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쁘지 않았다. 지옥공항에서 제공되는 서비스에 대한 설명을 할 때 성적인 내용이 너무 비중이 높았던 거 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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