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 움베르토 에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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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이걸 읽었다고 어디 가서 말하고 다녀되 될 지 모르겠다. 이 안에 담긴 방대한 정보를 2/3 정도는 떨궈내고 오로지 '이야기'로만 받아들였다. 줄거리를 대라고 하면 할 수 있으나, 책을 온전히 받아들였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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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소의 수기를 발견하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아드소와 윌리엄 수도사의, 일종의 수도원 연쇄 살인사건의 전말을 밝혀내는 추리 소설이다. 큰 줄기는 그러한데, 내가 2/3 가량의 정보를 떨궈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이걸 쓴 사람이 움베르토 에코이고 그는 단순한 이야기만 던져줄 생각이 없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가톨릭의 역사와 관련 인물들을 줄줄이 나열하며 토론하고, 아무튼 뭔가 되게 많이 이야기한다. 내 그릇이 너무 작아 차마 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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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메인이 되는 이야기의 트릭을 일찌감치 알고 시작한 덕분에 긴장감이 좀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 죽었는지 다 알지롱. 이런 못된 심보였는데, 마지막에 장서관까지 그렇게 되어버리는 줄은 몰랐다. 와. 이건 허무함이나 무력감을 넘는 더 크고 엄청난 무언가였다. 장서관....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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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몇 장과 중간 중간 아주 짤막하게 사건의 진행 정도만 파악했고, 마지막에 가서야 이야기가 휘몰아친다. 눈을 떼지 못할 정도의 몰입감이다. 근데 그 단계에 이르기까지 아주 많은 부분이 도저히 눈으로 대충 읽는 것조차도 못할 정도로 나를 몰아세운다. 낯설고 어려운 가톨릭사... 가톨릭 인물사... 가톨릭 문화사... 신학... 철학... 독초나 마녀 얘기 같은 건 재미라도 있지. 다른 건 정말 모르겠다. 자기들끼리 서로 맞다고 말로 싸우는데 뭔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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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판에 윌리엄과 호르헤가 나눈 대화는 그래도 알아 들었다. 매우 흥미진진한 논쟁이었다.
아래는 스포일 수도 있음.
오냐, 네 머리도 이제 돌아가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건 안팎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원장이라는 자는 오로지 수도원의 명예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 자신이 범인인지도 모르고, 그 자신이 다음 희생자가 될지도 모르는 판국인데도 불구하고, 원장은 오로지 이 수도원의 추문이 산을 넘지 못하게 하려고만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 수하의 형제는 죽어도 좋으니 수도원 명예만은 지켜야겠다는 발상이 어디 가당키나 한 노릇이냐? 봉건 영주의 후레자식! 토마스 아퀴나스의 무덤을 파서 제 명예의 속살을 찌우는 저 공작새 같은 허장성세! 술잔만 한 반지를 끼어야 살맛이 나는 저 술부대 같은 자! 오냐, 잘났구나, 너희 베네딕트회 땡중들! 왕족보다 사악하고, 귀족보다 더 귀족적인 것들이로다!
사부님... 저도 베네딕트회....
나는 듣기가 민망하여 감히 힐난하는 말투로 사부님에게 대들었다.
닥쳐라, 이놈, 네놈도 한통속이 아니더냐? 너희 무리는 범부도, 범부의 자식들도 아니다. 농부가 몸을 의탁하는데 너희라고 거절하기야 하겠느냐만, 너는 어제 너희 무리가 바로 그런 범용한 농부의 자식을 속권에 넘겨주는 걸 보았다. 하지만 범부의 자식이 아닌 자는 어떻게든 지키려 들 테지. 원장은 능히 그런 사람을 골라내어 지하 보고에서 쳐죽이고, 수도원 명예를 높인답시고 그 콩팥을 꺼내어 성보 상자에다 넣을 수 있는 위인이다. 그러니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 비천한 소형제회 수도사들이야 이 거룩한 집에서 쥐구멍밖에 찾을 것이 있겠느나? 하나, 저 원장이라는 자를 보면 쥐구멍도 찾게 해줄 성싶지도 않다... '고맙소, 윌리엄 형제여,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실 것이오, 이 아름다운 반지가 보이지요? 그럼 안녕히 가시오?' 그렇게는 안 될걸. 이건 나와 원장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나와 내 직무 사이의 문제다. 나는, 내 직무가 끝나기 전에는 이곳을 떠나지 않는다! 내일 아침에 떠났으면 했지? 그래. 이게 제 집이니까, 오라 가라 할 수 있을테지.... 오냐, 그렇다면 내일 아침까지는 내 일을 끝내는 수밖에... 그래, 기필코 끝내고 말겠다.
이거는 수도원 원장의 태도에 폭발한 윌리엄이 온갖 욕설을 해대고, 아드소가 소심하게 반항하는 부분인데
이 부분이 《장미의 이름》에서 그나마 제일 유머러스한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코미디>, 즉 <희극>이라는 말은 komai(시골 마을)라는 말에서 비롯됩니다. 말하자면 희극이라는 것은 시골 마을에서 식사나 잔치 뒤에 벌어지는 흥겨운 여흥극인 것이지요. 희극이란 유명한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비천하고 어리석으나 사악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희극의 주인공은 죽는 일이 없지요. 희극은 보통 사람의 모자라는 면이나 악덕을 왜곡시켜 보여줌으로써 우스꽝스러운 효과를 연출하지요.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을, 교육적 가치가 있는, 선을 지향하는 힘으로 봅니다. 거짓이 아닌 것은 분명하나 실상이 아닌 것 또한 분명합니다. 그런데 희극이라고 하는 것은 실상이 아닌 것을 보여 주는데도 불구하고 기지 넘치는 수수께끼와 예기치 못하던 비유를 통해 실상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검증하게 하고, <아하, 실상은 이러한 것인데 나는 모르고 있었구나>하고 감탄하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실재보다 못한, 우리가 실재라고 믿던 것보다 열등한 인간과 세계를 그림으로써, 성인의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보다, 서사시보다, 비극보다 더 열등한 것을 그림으로써 진리에 도달하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희극에 대해 설명해주는 윌리엄
이런 거 너무 알차고 좋아
나도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라 더 좋아
왜 하필이면 이 서책이 유포되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하게 되었던가요?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오.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은 하나같이 기독교가 수세기에 걸쳐 축적했던 지식의 일부를 먹어 들어갔소. 우리의 초대 교부들은 일찍이, 말씀의 권능을 깨치는 데 필요한 가르침을 모자람 없이 베푸셨소. 한데 보에티우스라는 자가 이 철학자의 서책을 극찬함으로써 하느님 말씀의 신성은 인간의 희문으로 변질되면서 삼단 논법의 희롱을 받아 왔소. <창세기>가 우주 창조의 역사를 모자람 없이 설명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이 우주를 무디고 끈적끈적한 질료로 재구하였고 아랍인 아베로에스는 세계는 절대로 멸망하지 않는다고 망발했소. 그 말에 거의 다 넘어간 형편이오.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로 익히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수도원 원장이 장사까지 지내 준 한 도미니크회 수도사(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꾐에 빠져 하느님을 자연의 이치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불렀소. 아로에파기타가 은혜로운 섭리의 아름다운 폭포로 그려 내었던 우주가 이때부터는 추상적 기능을 대변하는 지상적인 것의 소굴로 화했어요. 예전 같으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이 땅의 변질을 내려다보면서 눈살을 찌푸렸을 터인데 오늘날에는 땅이 있음으로 해서 하늘을 믿으려 하오. 오늘날에 와서는 성자와 선지자들까지도 신봉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일자일언이 바야흐로 세상의 형상을 바꾸어 놓기에 이르렀어요. 하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느님의 형상은 바꾸지 못했다오. 아직은. 하나 이 이 서책이 공공연한 해석의 대상이 되는 날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어 놓으신 마지막 경계를 기어이 넘게 되고 말 것이오.
웃음을 왈가왈부하는 데 당신이 왜 겁을 먹는 것이지요? 이 서책을 없앤다고 해서 웃음이 없어지겠소?
아니오, 결단코 아니오. 하지만 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허약함, 부패, 우리 육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웃음이란 농부의 여흥, 주정뱅이에게나 가당한 것이오. 지혜롭고 신성한 교회도 잔치나 축제 때는 이 일상의 부정을 용납하여 기분을 풀게 하고 다른 야망과 욕망을 환기시키는 것을 용납하고 있기는 하오. 하나 웃음이 원래 천박한 것, 범용한 자들의, 제 진심을 얼버무리는 수단, 평민을 비천하게 만드는 것임에는 변함이 없어요.
(생략)
내가 알기로 웃음은 범부를 악마의 두려움에서 해방시킵니다. 왜? 바보의 잔치에서는 악마 또한 하찮은 바보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서책에 이르면 문제는 달라져요. 이 서책은 악마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을 <지혜>라고 부르고 있어요.
(생략)
웃음은 잠시 동안 범부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러나 두려움, 정확히 말하자면 하느님을 두렵게 여기는 마음은 곧 법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한데 이 서책은 악마를 두들려 불똥이 튀게 하고, 이 불똥으로 온 세상을 태우려 하는가 하면, 프로메테우스도 알지 못하던 이 웃음을, 두려움을 물리치게 하는 데 대단히 요긴한 희한한 예술로 정의하고 있어요. 웃는 순간, 범부에게는 죽음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지나고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일상으로 되돌아오면 죽음의 두려움이 잊힌 계절처럼 되돌아옵니다. 하지만 이 서책에 따르면,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해, 죽음을 쳐부술 수 있는 새로운 파괴적 겨냥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우리 죄 많은 인생이 두려움에서, 일조으이 선견지명이자 천상적 은혜 중에서도 가장 은혜로운 그 두려움이라는 것에서 해방되면, 그럼 우리는 뭐가 되겠습니까?
(생략)
이것을 그대로 두면 이 서책이, 인간이 이 땅의 환락경만으로도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해괴한 사상을 고취시킬 우려가 있어요. 그대의 스승이라는 로저 베이컨이 자연의 경이가 곧 천국이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았듯이 말이오. 이것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도 없고 받아들여서도 아니 되는 사상이오.
(생략)
이 영감아, 악마는 바로 당신이야!
잘 들어둬. 당신은 속았어. 악마라고 하는 것은 물질로 되어 있는 권능이 아니야.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 이런 게 바로 악마야!
윌리엄이랑 호르헤랑 싸우는 중이다
아주 재미나다
가짜 그리스도는, 그 사자가 그랬듯이 유대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먼 이방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잘 들어 두어라.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성자 중에서 이단자가 나오고 선견자 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윌리엄이 아드소에게.
너무나 사이비나 이단의 행태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어서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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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개운해. 나 이제 다른 책 읽을 수 있어!
(병렬식 독서 못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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