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궁금하고 보고 싶은데, 도서관에서 빌릴 수가 없어서 결국은 사버렸던 책이다. 우리동네 도서관에 이게 왜 없는 걸까? 왜 없지??
천년의 사랑 / 양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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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엄청나게 인기가 있었던 베스트셀러라는 것과, 제목에 드러나듯 전생과 현생을 잇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소설 정도로 알고 있었다. 내가 보았던 양귀자 작가의 소설과는 뭔가 다른 느낌인 것 같아서 더 궁금했다. 전생을 이야기하는 사랑 이야기라면, 판타지인가? 판타지 로맨스?? 로맨스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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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시. 그럴리가 없지. 팍팍하고 거친 현실을 벗어날 리 없지. 《천년의 사랑》은 갓난 아기 시절 버려져 고아원에서 자랐지만 꿋꿋하고 훌륭하게 자신의 삶을 일궈냈던 오인희라는 여자의 이야기이자, 그녀와 운명으로 엮인 성하상이라는 남자의 순애를 담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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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점과 인칭이 오가는 구성이라 처음엔 조금 헷갈렸다. 근데 첫 장, 첫 문장부터 나를 너무 휘어잡아 버리잖아.
지금, 나는 한 여자에 대해 말하려 한다.
뭇 사람들은 별 수고 없이도 누리는 하찮은 행복에게조차 한 번도 이름을 불려보지 못했던 여자, 하지만 모든 이들은 한사코 피해 가는 그 많고 많은 불행에게는 빠짐없이 호명당해 보아서 누구보다 절망에는 익숙했던 한 여자에 대해 나는 지금 말하고자 한다.
오인희에 대한 설명이 여기 다 담겨 있다. 처음엔 그저 인상깊은 구절이구나 하고 넘어간 정도였는데, 다 읽고 나니까 이 첫 문장이 너무너무 사무쳤다. 불행에게 빠짐없이 호명을 당한다는 표현이 너무.. 너무...너무다.
철저하게 스스로를 훈련했다. 어차피 살아야 한다면 덜 다치며 사는 법을 익혀야 했다. 둥근 밥상에서 이마를 맞대고 저녁밥을 먹어본 기억이 없는 자는, 지독한 복통이 와도 배를 문질러줄 어머니의 약손을 가지지 못한 자는, 비오는 날의 교문 앞에서 우산을 들고 하교길을 맞으러 나온 가족을 곁에 두지 못한 자는, 그런 자는 다르게 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성하상이라는 남자는 누구냐.
"이유는 하나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까닭이지요. 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십니다, 당신은. 그것도 대답은 하나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호흡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지금 당장 내게 주어진 과제니까요. 당신을 철저히 사랑할 수 있음으로 해서 우주의 섭리에까지 나의 미약한 마음이 닿기를 원하고 이습니다."
정말 오로지 오인희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그것만이 그의 숙명이자 살아가는 이유인 사람이다. 사랑의 의인화같은 사람.
오인희를 끊임없이 호명했던 불행 중 제일 쓰레기같고 제일 짜증났던 불행이라면 단연 김진우다. 오인희가 스스로 일궈낸 삶을 비집고 들어와 기어이 박살을 내 버리는 남자.
" (생략) 하지만 난 얼음 같은 당신을 녹였어. 이젠 당신이 우리 부모님을 녹여야 해. 얼음은 안 돼. 정말 안 돼. 날 위해서라도 그러면 안 돼. "
날 위해서라도.
인희는 그 말을 들으며 그의 가슴에 대고 있던 얼굴을 떼었다. 그는 지금 자기를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마음이 아픈 자기를 위로해달라고 말하는 것인가.
이때부터 슬슬 기미가 보였다. 그치만 인희는 그를 믿었고.. 좀 더 믿어보려고 했고.. 믿고 싶었고.... 하.. 정말 나쁜 개쓰레기 김진우
"그래. 난 이렇게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도 기뻐서 춤이라고 추었어야 옳았나! 당신이야말로 어리석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좀 더 신중했어야 할 사람은 바로 당신이 아니었어?"
남자는 마구 퍼부어놓고 바람처럼 휭하니 나가버린다. 현관문이 꽝,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여자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어리석다고? 좀 더 신충했어야 했다고? 세상에, 지금 그 말을 쏟아부은 사람이 정녕 그였던가. 여자는 문득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세상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와락 무섬증이 솟구친다.
이러고 결국엔 회피하기까지. 무책임에 회피충인데다 마마보이이기까지 한 김진우다. 최악이야. 최악의 개새끼야.
오인희를 진정으로 아끼고 생각해주었던 사람이 사실 하나 더 있었다. 단 한 번의 실수(김진우를 소개시켜줌)가 너무 엄청난 나비효과를 일으키는 바람에 두고두고 인희에게 죄책감을 안고 살게 되지만, 그래도 본인의 능력 안에서는 해줄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다 해주는 정 실장. 정 실장 때문에도 되게 많이 울었다.
그러나 다음 날 그녀가 확인한 송별금은 늘 그래왔던 송별금의 액수가 아니었다. 인희는 송별금 속에 정실장의 이번 달 보너스가 다 담겨있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정실장은, 그녀가 알고 있는 정실장이란 사람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천년의 사랑》이라는 제목에 담긴 시간의 기록.
그리고 나는 보았다. 천년 전의 나를. 그리고 나는 또 보았다. 천년 전의 그녀를. 명상 속의 그림자는 바로 천년 전의 그녀였다. 그 뒤의 나는 사슴이었다가, 양이었다가, 풀이었다가, 하면서 이번 생에 비로소 '나'가 되었다. 나는 천년 만에 사람이 된 것이었다. 나와 이루어질 수 없는 비참한 사랑을 나누었던 그녀도 천년 만에 나와 동시대의 '그녀'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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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성하상이란 인물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가 명상을 하고 우주의 기운을 깨닫고 하는 과정들이 약간 비현실적이라 그랬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과거를 보고, 전생을 깨닫고, 인희의 존재를 느끼고, 무슨 초능력처럼 앞날을 내다보고 기운을 주고받고 이러는 게 사실 너무 허황되어 보이긴 해서. 그치만 나중에는 그냥 다 받아들이게 된다. 성하상이 너무 지고지순해서 앞뒤 따질 것도 없이 그냥 이 사람이야! 이 사람이라면 오인희를 불행하지 않게 해줄거야! 라고 믿고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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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말이죠. 첫 문장대로 오인희의 삶이 불행으로 점철되었다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성하상과의 행복한 한때? 정말 찰나의 순간으로 끝이나고, 둘이 함께하는 순간부터는 나도 모르게 내내 울었다. 정말 울기만 했다. 이미 정해진 결말을 알고 있고, 그 끝이 비극이라는 걸 아는 상태에서 보는 짧은 순간의 행복이라는 게 얼마나 슬프고 안타깝고 미어지는지 다시 한 번 느꼈다. 눈물 콧물 다 쏟았다. 아... 진짜... 너무하다. 오인희에게 너무 가혹한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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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 끌리는 재미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 치고 마지막에 너무 몰입해서 꺼이꺼이 울었다. 재미있게 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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