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

20250803 | 맨홀 / 박지리

카랑_ 2025. 8. 8.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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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리 작가의 작품은 그래도 다 챙겨 봤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맨홀》을 안 봤었다니. 익숙하게 알고 있는 제목이라 당연히 읽었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런데 안 봤었다. 세상에? 

 

맨홀 / 박지리

 

 

 

 

아, 이거 쉽지 않구만. 

화재현장에서 사람들을 구하고 죽은 정의로운 소방관이지만, 사실은 가정폭력을 일삼던 아버지였고, 그래서 아버지의 죽음이 오히려 반갑고 홀가분한 주인공이 있다. 하지만 지옥같은 폭력 속에서 두 손을 꼭 붙잡고 버텨 온 누나의 성장, 혹은 변화는 주인공을 당혹스럽게 하고, 평화로워질 것 같았던 현실 속에서 주인공은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아버지를 피해 누나와 함께 도망을 다니다 우연히 발견했던 어느 폐쇄된 공사장의 맨홀이 있다. 주인공은 그곳에 외국인 노동자의 시체를 유기한다. 주인공과 어울리던 무리들과 함께 저지른 살인이었다. 사실이 밝혀질까 불안에 떨었지만, 결국 자수를 했고, 죗값을 나누는 과정이 예상과는 달리 흘러간다. 주인공은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정의로운 소방관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증오하고 혐오했지만, 순간순간 아버지와 닮은 모습을 보이는 주인공을 볼 때마다 내가 다 떨리고 불안해졌다. 그러다 가족들에게 해를 입히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분노의 표출이 그만 삐끗해버린다. 《맨홀》은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고등학생의 이야기이고, 그가 가진 과거와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촘촘히 늘어놓는다. 덮어놓고 비난을 하기도, 마냥 동정하기도 애매하다.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갖는 보편적이고 사회적인 연민과,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에 대한 비난이 처음부터 끝까지 충돌한다. 나는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나는 범죄를 저질렀는데, 사회는 왜 나를 나 자체로 평가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 쪽에 가깝다.

 

 

 

저 애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 문제는 공이 아니란 걸. 
나 혼자 막기에는 구멍이 너무 컸다.

 


 

 

다리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본 사람들은 쓰레기와 우리를 구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의자에 앉아 있을 때만쿰은 우리는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태양은 우리를 위해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의자에 앉아 아침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낮에 발견된 작은 죽음과 하루의 끝이 아침처럼 다시 시작되는 밤을 목격했다.

 


 

 

나와, 나를 둘러싼 온 세계가 죽어 가는데도 책상 위의 작은 시계는 자꾸만 나를 미래로, 미래로, 밀어 넣고 있었다.

 


 

 

나는 달이에게 몇 번이고 사과했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 달이는 내 사과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달이가 옳았다. 그래, 사과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사과를 해도 한번 저지른 짓이 없던 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

 


 

 

엄마나 누나나 다들 그럴듯한 이유를 대면서 집에 오지 않는데 나만 충직한 개처럼 그 집을 지키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벽에도, 거울에도, 찬장에 놓인 접시 하나에도 폭력의 얼룩이 드리워진 곳이었다. 

 


 

 

그것이 어떤 이름이 붙은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더 열 받게 하고, 더러운 욕을 쏟아붓게 만들고, 엄마와 누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고 싶게 하면서 동시에 나에게 우월감을 안겨 주는 기분 좋은 쾌감이었다. 엄마와 누나는 나에게 겁을 먹었다. 내가 늘 우러러봤던 누나조차도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겁을 먹은 것이다. 그 힘의 불균형을 감지한 나는 침대 옆에 있던 쓰레기통을 발로 걷어차며 소리를 질렀다. 
"씨발, 병신같이 그딴 데를 왜 가는데. 이십 년 넘게 맞고 살았으면서 그 인간 보고 영웅이니 뭐니 떠받드는 데 가서 앉아 있고 싶어? 그 인간이 우리한테 어떻게 했는데. 집에만 오면 칼부림하고, 가스 폭발시켜 버릴 거라고 협박하고, 누나랑 나 가둬 놓고 학교도 못 가게 한 인간이 그 인간이야. 엄마 안 찾아 오면 우리까지 다 죽여 버린다고 한 게 그 인간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그딴 인간을 추모하는 행사에 갈 수 있어?"
말을 하기 위해 굳이 생각이라는 과정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내 마음 어딘가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지난 시간들이 더는 참지 않겠다는 각오를 하고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엄마가 이딴 식으로 병신같이 구니까 여태까지 찍소리 한 번 못 하고 그딴 쓰레기 같은 새끼한테 맞고만 산 거야. 알아? 엄마 때문에 나랑 누나는 매일매일을 지옥에서 살았다고. 그걸 아냐고."
               (중략)
".... 돌아가셨잖아. 이제 다 잊고 용서해 줘야지. 어쩌니 그럼, 그래도 니 아빤데."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어 가던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의 그 백치 같은 소리에 다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나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 댔다.
"씨발, 나한테 그딴 소리 하지 마. 왜 그딴 쓰레기가 내 아빠야. 낳아 줬다고 다 부모야? 내가 제일 죽이고 싶어 하는 인간이 어떻게 내 아빠가 될 수 있는 건데... "
그때 누나가 말했다.
"... 아버지도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이야."
               (중략)
엄마 옆에 달라붙어서 엄마 같은 한심한 여자나 할 법한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건 내가 아는 누나가 아니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과거를 뒤트는 짓에는 동참하지 않을 것이며, 죽음이 모든 것을 용서하게 하지도 않을 것이며, 맹세처럼 굳은 증오를 시간 따위에 녹이지도 않을 것이며, 그 악마 같은 사람이 내 아버지로 둔갑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란 것을.

 


 

 

나는 완벽한 복수를 할 때까지 내 몸의 멍이 하나도 지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몸에 난 폭력의 흔적은 증표처럼 영원히 남아야 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멍청해서 멍이 사라지는 것과 함께 자신의 몸에 멍을 남긴 그 악마 같은 발길질까지 모조리 잊어버리니까. 그런 식으로 폭력은 다시 반복되니까.

 


 

 

엄마와 누나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셋은 봉합의 전문가들이었다. 특히 엄마는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데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새벽까지 얻어 맞고도 다음 날 아침 그 사람을 위해 태연히 아침 밥상을 차렸던 엄마와 학교에서는 누구보다 더 제대로 된 집안의 딸인 것처럼 연기했던 누나, 보고 들은 더러운 것들을 몸 안에 꽉 가둔 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나. 우리 세 사람은 발광에 가까웠던 내 난동 역시 침묵으로 잘 봉합해서 아예 없었던 일로 만들어 버렸다.

 


 

 

내가 제대로 된 인간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런 헛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소리쳤어야 했다. 사랑?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사랑이라는 것을 한 번도 받아 본 적도, 해 본 적도 없다고 증언했어야 했다. 나에게 스스로에 대한 긍지라는 게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나는 그 사람의 죽음에서 어떤 슬픔도 느끼지 않았으며 내가 저지른 살인은 오로지 내가 선택한 결과였다고 항의했어야 했다. 당신들이 나를 성실하고 착한 아이로 알고 있었을 때, 나는 늘 살인을 꿈꿨고 오히려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살인자가 되는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똑똑히 증언했어야 했다. 지옥 같았던 지난 시간에 빚을 지지 않으려면 나는 어떤 말이라도 했어야 했다. 10년 형이든 20년 형이든, 사형이든, 내 죄에 대한 대가를 자랑스럽게 치르겠다고 선언했어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변호사의 그 마지막 호소가 판사를 설득할 수 있기를 바라며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소방대원과 생존자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담임이 써 준 탄원서에 크게 감동받은 얼굴까지 꾸며 내고 있었다. 나도 알고 보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그날 밤은 정말 운이 나빴던 것뿐이라고, 한 번만 용서해 주면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깊이 반성하는 태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죽은 그 사람이 나를 구해 여기서 데려 나가 주길.... 간절히 기도했다. 나는 그 정도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판사는 막바지에 나에게 '한 아버지'로서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며 판결문보다 길게 이야기했다. 대충 말하자면 아버지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내가 행동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충고였다. 나는 판사가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죽인 파키 이야기를 꺼냈다면 내 마음이 조금은 움직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네가 죽인 파키의 영혼이 죽을 때까지 네 주위를 떠돌 것이라거나 파키의 가족들이 어느 날 너에게 똑같이 복수를 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면 나는 평생 겁에 질린 채 아주 조심스럽게 살아갈 것이었다. 

 

 

 

그럴듯한 감상을 남기고 싶었는데 그러기 힘들어서 그냥 기록 남김. 다 보고 좋으면 책 사야지! 했는데 이건 좀 고민된다. 별로라서가 아니라 내 감상이 정리가 안 되어서.

 

일단 다윈 영부터 사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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