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들어본 제목이었다. 나는 영화 제목으로 먼저 알고 있었고, 원작이 있다는 것도, 작가가 누구인지도 사실 최근에야 알았다. <모순>을 감명깊게 보고 골라들었던 양귀자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의외로 굉장히 무겁게 사회적 문제들을 다루고 있었던 탓에 잠깐 물러서 있다가, 이번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을 골라 들었다. 이 역시 엄청 인기가 많은 작품이라 도서관에 예약을 걸어두고 겨우 빌렸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 양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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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들었을 땐 이게 '욕망'에 관한 내용인 줄 알았다. 그것도 다소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이나 욕구에 관한 내용일 것 같아서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아니 이게 무슨 납치 어쩌구 그런 얘기라잖아요? 전혀 상상도 못한 스토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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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도 더 된 1992년 작품이다. 그런데 지금 읽어도 전혀 무리가 없다. 그 안에 담긴 사례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똑같이 일어나고 있어서, 전혀 옛날 이야기나 구시대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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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강민주가 어떤 사람인지는 작가의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강민주가 등장했다. 낮은 포복을 혐오하고 높이 기립해서 사는 여자, 물살을 거스르며 하류에서 강의 상류로 나아가는 여자. 그런 주인공이 필요했다. 현실에는 없지만, 소설에서는, 소설이므로, 강민주 정도는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작가의 말 中 |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기까지의 강민주는, 사실 되게 멋지다. 강민주의 행위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가 지녀온 신념이나 삶의 방식같은 것은 상당히 공감이 되고 닮고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그래서 그런가, 백승하 납치 이후 그녀가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이 조금 안타깝고 아쉬웠다.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끝까지 강민주답게 밀고 나갔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이후에는 묘하게 황남기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그리고 그의 선택이 설득력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고, 강민주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황남기의 독단적인 행동과 궤변에 불과하지만,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을 강민주가 과연 얼마나 견뎌낼 수 있었을지,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 스스로를 얼마나 어떻게 파괴적으로 몰아갈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왠지 그 이상의 결말은 없지 않나 싶다.
사실 읽으면서는 강민주의 마지막이 황남기가 아닌 백승하의 손으로 이루어질 줄 알았다. 둘이 준비하던 연극의 내용이 강민주의 결말에 대한 복선이고, 결국 연극과 같은 엔딩을 맞을 줄 알았는데, 황남기였다니. 나는 정말 백승하의 칼에 찔리는 최후만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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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얼마나 강민주에게 이입을 했냐 하면, 나중에는 강민주의 예상대로 백승하의 실체라는 것이 있길 바랐다. 더럽고 치졸한, 숨겨져 있던 모습이 드러나 결국 강민주가 옳았다는 것이 밝혀지길 바랐을 정도. 그 정도로 나도 모르게 강민주를 응원하고 있었는데, 백승하는 끝까지 이상적인 인간이었다. 털어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했는데 정말 먼지 하나 안 나왔다. 거기다 자신의 그 매력으로 강민주까지 흔들리게 만들었다. 게다가 끝까지 강민주를 진심으로 대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그가 나쁜 사람이길 바랐던 내가 다 미안하구.. 민망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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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볼 수밖에 없는 책이었다. 눈을 뗄 수 없다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 막힘없이 쭉쭉 읽히는데, 작가 역시 거침없이 써내려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강민주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을 정말 토해내듯 쏟아내는 느낌.
작가의 말을 보니 역시나.
마음속에서 터져나오는 말들을 손이 미처 따라잡지 못해 쩔쩔매는 순간도 있었다.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작가의 말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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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 강민주가 하는 말들이 정말 다 주옥같다. 하나하나 새기기에 벅찰 정도로 하는 말마다 다 옳은 소리다.
나는 상식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가장 경멸한다. 그런 사람들이 꼭 남의 사생활을 들여다보기 좋아하고, 필요 없는 호기심으로 사람 피곤하게 한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나는 여자들이 그렇게나 많은 남자들에게 당했으면서도 여전히 남자에게 환상을 품는 것이 정말이지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내가 선택한 이 운명 말고, 다른 운명의 남자가 어딘가 꼭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여자들의 우매함은 정말 질색이다. 남자는 한 종(種)이다. 전혀 다른 남자란 종족은 이 지구상에 없다.
희생이라니, 고통의 인내는 미덕이 아니다. 그것이 미덕이라는 주장은 기득권을 쥔 자들의 염치없는 요구일 뿐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보수주의자들을 혐오한다. 그들은 정신의 진보를 억압한다. 억압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적이다. 억압에 대해서 말하라면 세상의 반절인 여자들이 당한 수난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가해자는 세상의 또 다른 반절인 남자들이다. 바로 한 세기 전만 해도 여자는 인간이 아니었따. 난로와 책상 같은 물건에 불과했다.
언론이 즐겨 사용하는 말에 '사회 지도층 인사'라는 것이 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영 비위가 상한다. 단언하건대, 사회를 어지럽히는 인사는 있을지언정 사회를 지도하는 인사는 없다. 대단찮은 학식이나, 상업주의 언론에 이름을 팔은 속된 명성으로 자신을 지도층 인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나는 가장 혐오한다.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
그 누구도 어떤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방식대로 살뿐이다. 선각자는 있어도 지도자는 없는 것이다. 자신을 내던져 새로운 것을 깨우치는 일은 존중받을 수 있으나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채 남을 지도하려 드는 일은 조롱받아 마땅하다.
욕설은, 하는 사람은 단지 입버릇일지 몰라도 듣는 사람은 매번 날카로운 비수에 찔리는 기분일 것이다. 남자라 해서 여자에게 아무 구속 없이 '쌍년'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별로 길지 않은 상담을 끝내고 노트에 이렇게 적는다.
'욕설과 일상 언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만 보아도 남자들은 미개인이다. 그들은 여태도 동물에서의 진화과정을 끝내지 못한, 아직 많은 부분 수성(獸性)이 남아 있는 야만인이다.'
우리 속담에는 북어와 같은 급수를 굳이 여자라는 성(姓)에 한정 짓고 있습니다만, 사흘에 한 번은 두들겨 패야 다소곳하다는 점에서는 남자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저는 이번 기회에 확인하였답니다.
태초에 세상에는 두 개의 성(姓)이 주어졌다. 인류는 역사의 시작을 지배와 억압으로 열어버리는 실수를 범했다. 남성은 지배하고 여성은 지배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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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주는 이런 사람.
나는 수직에 반하는 평행을 경멸한다. 나는 평범의 미덕은 이해하지만, 그것을 존중하지는 않는다. 나는 보통의 삶보다는 강렬하고 눈부신 특별함에 압도적으로 경도된다.
그랬다. 나는 그녀들이 간절히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아주 완벽하게. 나는 비로소 내가 초월자라는 것을, 응징의 대리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알고 난 이후에는 전화 속의 고뇌에 찬 음성들이 새롭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요? 그렇지요?'
나는 불행을 호소하는 여자들에게 할 말이 좀 있었다. 그래서 다른 날보다 훨씬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당신들은 자신의 인생이 왜 빗나갔는지 그 이유조차 모릅니다. 그래요. 대안이 없을 때는 맹목적으로 자신 속으로 파고드는 심정을 나는 이해합니다. 자, 하지만 이제부터는 귀를 열고 눈을 뜨고 입을 여세요. 당신들은 이제 새로운 것을, 거부와 반항을 넘어선 놀라운 역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의 이 역습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동참을 유도하는 작은 시작입니다.
나는 이 일을 도모하면서 한 번도 실패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나는 늘 그랬다. 나는 모든 일에 실패를 겁내지 않는다. 실패할 일은 하지도 않지만, 일단 시작한 일에도 실패 따윈 없었다. 나는 인간이란 이름의 텍스트로 살아가는 운명이 아니다. 나는 아주 일찍 그것을 거부했다. 단호하게, 또한 확실하게.
나는 연약한 이 땅의 여자들에게 절망한다. 내가 벌이고 있는 남자들과의 전쟁에서 진정한 동성의 협력자를 얻는 일은 정녕 불가능한가. 어차피 신의 대리인 자격으로 홀로 치르는 전쟁, 끝까지 혼자 가겠다는 내 결심은 더욱 굳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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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다. 너무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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