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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연히 들어갔던 어느 작은 동네 서점에서 이 책을 만났다. 눈에 띄는 제목과 표지의 색깔이 시선을 끌었었고, 늘 그렇듯 책 뒷면의 추천사를 먼저 살폈다. 

 

신을 죽인 여자들

 

앗, 알모도바르!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화를 진행하고 싶다'는 말 한마디가 엄청난 관심과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알모도바르가 영화화하고 싶다고 하면 이 책이 이게, 보통은 아닐거란 말이지. 

 

알모도바르 감독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가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는지는 몇 편 본 그의 영화덕분에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덕분에 이 책이 너무너무 궁금해졌다. 

 

 

때는 5월 5일. 묵호로 어린이날맞이 여행을 떠나는 날이었다. ktx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왕복으로 약 4시간. <신을 죽인 여자들>과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책을 다 읽고도 제목인 <신을 죽인 여자들>이 아주 잘 맞는 제목인지는 조금 의문이었다. 그리고 작가 후기에서야 등장하는 책의 원제인 <Catedrales(대성당)>도 조금 의아했다. 그런데 소설을 여는 첫 페이지의 문장을 보니 제목의 의미가 확 와닿았다. 

 

신을 죽인 여자들

 

 

하느님 없이, 저들만의 대성당을 짓는 이들에게

 

 

소설을 끝까지 보고 나면, 이 말이 너무 와 닿는다. 사건을 파헤치며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느껴지는 갑갑함과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이들에 대한 정의가 이 한 마디로 정리된다. 

 

 

카르멘, 리아, 아나는 자매다. 이 중 막내인 아나가 어느날 갑자기 끔찍하게 살해되지만, 진실을 밝히지 못한 채 30여 년의 시간이 흐른다.  아나의 사건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그 시작은 아나의 작은 언니인 리아다. 그 다음은 큰언니인 카르멘의 아들 마테오, 아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마르셀라, 사건 수사 관계자였던 엘메르, 카르멘의 남편이자 당시 신학생이었던 훌리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나의 큰언니 카르멘으로 이어진다. 각 장의 서술자는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헐 그러고 보니 아나의 아버지는 단독 파트가 없네? 소설 전반에서 계속해서 언급되는 인물이라 아버지의 시선에서 진행된 이야기가 없다는 걸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위에서 언급된 인물들 외에도 아나의 아버지 또한 주요 인물 중 하나이다. 

 

 

범죄소설이라고 하는데, 그것만 기대하고 보면 좀 긴장감이 떨어질 수도 있다. 놀라운 반전이나 기발한 수법같은 것을 자랑하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은 단순히 범인찾기에만 집중하지 않고 인물들간의 관계와 상황, 심리를 조금씩 확장시켜 나간다. 가령 리아의 다음 서술자로 등장하는 마테오는, 아나의 사건 당시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소설 속 관계들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데 꽤 중요한 역할을 한다. 

 

 

'종교적 광신이 산산조각 낸 소녀를 둘러싼 비밀'이라는 문구를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보고 나면 종교에 대해 부정적이 될 수밖에 없다. '광신도'라는 말로 조금 포장(?)을 하긴 했지만, 음. 

 

그리고 이런 부분에서 알모도바르 감독이 더 열광했나 싶기도 했다. 감독님 카톨릭 소재 되게 좋아하지 않나...? 아닌가...? 

 

 

광신도와 회피형 인간의 환장의 콜라보라고 하면 될까.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뱉어내는 개소리들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조금 모아봤다. 스포가 될 수도 있다.

 


한때 나에게 얼마나 책임이 있는지에 대해 의심을 품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실제로 여성들은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싸워오지 않았던가? 임신중지는 자기들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내가 무슨 책임을 져야 하는 거지? 그들은 스스로 결정하기를 원한다. 일단 결정을 내린 이상 여자들은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아나는 결정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느님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신 것뿐이다.

 


"아나가 철부지처럼 엉뚱한 생각을 하게끔 내버려두지 말라고. 그 아이가 눈치채지 못하게 잘 구슬리고 타일러서 마지막 순간에 결정을 내리도록 해. 만약 아나가 당신더러 어떻게 할 거냐고 묻거든 아무 말도 하지 마. 실제로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니까. 이제부터 모든 일을 하는 것은 그 아이야."

 

 


왜냐하면 아나의 죽음은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이유를 설명할 생각은 없다. 굳이 내가 설명해야 한다면 그곳은 이 지상이 아니라 다른 곳이다. 

 


더욱이 그 아이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이를 고백했다면, 순수한 자비이신 하느님께 용서를 받았을 것이다. 나는 잘 풀려야 마땅한 일이 왜 그렇게 틀어졌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그 또한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종종 우리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물론 우리의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말이다.

 

 

 


하느님의 뜻이었다. 특히 이번만큼은 하느님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가지 마십시오. 그러나 이번에는 제 뜻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제가 이루었나이다.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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