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 클라우디아 피녜이로의 <엘레나는 알고 있다>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기회가 되면 봐야지,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 기회였다.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정말 궁금해 하며 봤는데.
엘레나는 알고 있다 Elena Sabe
결론부터 말하자면 별로였다. 각색이 좀 이상하게 됐다. 원작이 가진 매력과 의미가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원작은 일종의 '추리' 장르로 읽히기도 한다. 엘레나가 딸의 죽음을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고 굳게 믿으며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애쓰는, 그 과정에서 그녀가 앓고 있는 파킨슨이 큰 걸림돌이 되어 그 문제점을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 믿는 사람, 자신을 대신해줄 '몸'을 찾아 나서는 과정이 하나의 큰 줄기를 이룬다. 그리고 그 힘겨움과 육체적 한계는 엘레나가 먹는 파킨슨 약 한 알을 먹는 시점을 기준으로 나뉘고, 그 때마다 독자 또한 몸이 굳는 간접 경험으로 괴로워진다. 그리고 끝내 엘레나가 자신을 대신해줄 '몸', 이사벨을 만나고 둘이 나누는 대화에서 이야기는 폭발하는 에너지를 갖는다.
'엘레나는 알고 있다'라는 제목 또한 이 부분에서 강한 의미와 무게를 갖게 되는데, 영화에서는 이 부분이 너무 많이 생략됐다. 각색 과정에서 이사벨이 완전한 타인이 아닌 리타의 친구로 바뀐 것도 무게감을 잃는 데 치명적인 역할을 했다. 엘레나,리타와 이사벨이 의 관계가 완전한 타인이라는데서 그 악연의 의미가, 엘레나와 리타의 교만과 독선이 더 강조되는 것인데, 이사벨이 단순히 성적 유희나 쾌락을 즐긴 결과로 임신을 했다는 식으로 각색되어버렸다.
그리고 리타가 주치의에게 누굴 도와준다는 거냐, 나냐, 엄마냐 따져 묻는 장면도 그 공간에 엘레나, 리타, 주치의 이렇게 셋이 함께 있어야만 그 압박감과 긴장감에 짓눌려 터져나오는 울부짖음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인데 영화에서는 리타와 주치의 둘의 대화로 처리하고 엘레나는 나중에 그것을 전해듣는(영화적으로는 그 공간에 있는 것으로 표현되긴 했지만) 상황으로 바뀌어 버린다. 아니야. 그곳에 엘레나가 있어야만 해. 엘레나는 고집을 부리고, 주치의는 엄마를 잘 돌봐드리라는 뻔한 소리만 해대는 그 답답해 미칠 것 같은 상황이 그대로 표현되었어야 한다고 ㅠㅠㅠㅠㅠㅠㅠㅠ
엘레나의 육체적 한계에 대한 표현도 성에 차지 않았다. 책에서 엘레나는 숙여진 고개때문에 일정 수준 이상으로 시야를 확보하지 못한다. 영화가 엘레나의 시야를 좀 더 표현했더라면, 앞에서 사람들이 오가고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만 그들의 얼굴도, 표정도 확인하기 어려운 시야같은 것을 표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리고 엘레나가 자신을 대신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몸을 찾아 나서는 것도 많이 약해졌다. 엘레나의 움직임에 크게 어려움이 없어보인다고 해야 하나. 책에서 각 장을 나누는 '약'이 주는 긴장감과 위태로움이 영화에서는 전혀 보여지지 않았다. 심지어 약을 먹는 장면도 별로 없다. 엘레나는 약을 먹어야만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상태의 몸을 가진 사람인데도.
되게 이도저도 아닌 영화라는 느낌을 받았다. 뭘 얘기하고 싶은거지. 원작이 갖는 힘은 이것보다 훨씬 큰데.
<엘레나는 알고 있다>는 꼭 책으로 봐야 한다. 꼭이요. 꼭.
20250226 | 엘레나는 알고 있다 /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참 희한한 과정으로 만나게 되었다. 앞서 루이스 세풀베다의 작품을 읽으면서 우연히 엄지영 번역가의 이력을 보게 되었고, 흥미로워보이는 제목들이 많이 보이기에 그럼 엄지영 번역가를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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