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씨남정기>를 너무 재미있게 (찔찔 울면서) 본 것을 계기로, 그동안 미뤄두고 있던 고전 작품들을 본격적으로 읽어보리라 마음먹었다. 그 첫 번째, <방한림전>이다.
방한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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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들어본 제목이고 익숙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머리말에 쓰인 글을 보고 좀 놀랐다.
『방한림전』은 학계에 소개된 지 채 20년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
<방한림전> 머리말 中 |
학계에 소개된 지도 20여년 밖에 되지 않은 <방한림전>을 나는 도대체 어디에서 들어보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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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대략적으로, 여성 주인공인 여성서사 작품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긴 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번에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방관주는 여성으로 태어났으나 천성이 소탈하고 검소했고, 시경과 서경을 배우며 일반적인 여자 아이와는 사뭇 다르게 자랐다. 부모님도 그런 관주의 뜻을 받아들이고 딸이 싫어하는 일을 구태여 권하지 않았다. 관주가 8세 되던 때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이후 관주는 완전히 남자로서 살아가게 된다. 과거에 급제하자 많은 혼담이 쏟아지고, 그 중 관주의 본질을 알아 본 영혜빙과 부부-지기가 되어 평생을 함께 한다. 우연한 기회에 하늘로부터 아이를 얻게 되고, 때가 되어 한날에 눈을 감는다.
많은 생략이 있었지만, 뭐, 사실 그 사이에 크게 대단한 사건이나 사고가 있지는 않다. 방관주의 성별이 탄로날 위기같은 것도 없고, 시기나 모략에 휘말리는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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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방관주와 영혜빙의 관계가 재미있었다. <방한림전>이라는 제목때문에 주인공이 방관주처럼 느껴지는데, 나는 사실 그보다 더 뛰어난 인물은 영혜빙이고, 그녀의 여러 모습들이 신기할 정도로 현대적으로 느껴졌다.
" 여자는 죄인이라 이미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남편의 규제를 받아야만 하니, 남자가 되지 못할진댄 인륜을 끊는 것이 옳으리라." 하며 형제들이 부부의 연을 맺어 구차하게 살아가는 것을 비웃었다. 다른 형제는 이런 혜빙 소저가 여자답지 않게 활달하다고 조롱했으며, 부모 또한 그녀의 생각을 이상하게 여겼다. |
<방한림전> 中 |
영혜빙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주옥같다. 정말이다. <방한림전>을 읽다 보면 영혜빙에게 반할 수 밖에 없다.
내가 보건대, 방씨는 얼굴이 맑고 깨끗하며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엄숙하여 일세의 기남자奇男子라 할 만하다. 이런 영웅 같은 여자를 만나 평생 동안 지기가 되어 부부의 의리와 형제의 정을 맺어 일생을 마치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다. 나는 본래 남편에게 사랑받는 아내가 되어 그의 통제를 받고, 눈썹을 그리며 남편의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는 것을 괴롭게 여겨왔다. 그래서 평소 금슬우지와 종고지락을 원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이런 일이 생겼구나. 이를 어찌 우연이라 하리오? 반드시 하느님께서 내 뜻을 헤아리신 것이리라. 평생 남편을 위해 수건과 빗을 관리하는 것은 졸렬하고 구차한 일인데, 그보다는 방씨와 인연을 맺어 지기로 평생을 함께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
<방한림전> 中 |
이것이 어찌 19세기 말 작품에 나오는 여인의 생각이란 말인가.
한편 방한림, 방관주는 쪼끔 거시기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남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서인가. 종종 이런 진짜 남자같은 태도를 보일 때면 좀, 거시기하더라.
승상이 집으로 돌아와 부인을 대하며 연석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어사를 불러 천자께 하사받은 책과 서진을 주면서 말했다. "내가 임금께 얻은 것을 네게 전하노라." 어사는 크게 기뻐하며 두 손으로 공손하게 책과 서진을 받아 들고 물러났다. 어사가 물러간 후 승상이 통천관을 쓰는데, 부인이 쌀쌀맞게 웃으면서 말했다. "폐하께서 군자에게 상급하신 것을 아들과 그대는 나누어 가지되, 어찌하여 첩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나이까?" 승상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것들은 모두 부인에게 쓸모없는 것이기에 주지 않았을 뿐이오. 하나 지금 부인이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이 모두 내게서 나온 것이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넉넉하다 할 것이오. 그런데도 이렇듯 투정하시니 부인의 욕심이 지나치게 심하구려." 부인이 가만히 웃으면서 말했다. "나에게 쓸모없는 것이 어찌 유독 그대에게만 쓸모가 있겠소? 그런데도 굳이 이렇게 쾌활한 척하십니까?" 승상이 웃던 얼굴을 찡그리고 흥이 사그라들어 말했다. "부인은 더이상 그런 말을 들먹이지 마오. 지금 사람들은 나를 어엿한 관료라 생각할지언정 그중에 특별히 의심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소이다." 부인이 가만히 웃기만 했다. |
<방한림전> 中 |
임금에게서 받은 책과 서진을 아들과만 나누고, 그것이 부인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방관주의 모습이 좋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는 영혜빙이 '몸에 걸치고 있는 모든 것'만으로 만족할 줄 모른다는 듯 타박한다. 영혜빙이 단순히 물질적인 것에 욕심을 보인다고 치부하는 것이다. 감히 영혜빙에게!!!!
나에게 쓸모 없는 것이 어찌 유독 그대에게만 쓸모가 있겠소? 라고 말하는 말에 찔리긴 한 모양이다. 단박에 짜증을 내고 기분나쁜 티까지 내고. 남자처럼 살더니 남자가 다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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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관주와 영혜빙의 관계를 현대의 '동성혼'으로 보고 학계에서 크게 주목한다는데, 글쎄, 그렇게 단순하게 볼 일인가 싶다. 관료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남자여야만 했던 세상에서, 그것을 위해 성을 숨긴 인물과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서포트해 준 인물의 관계를 '동성혼'이나 '동성애'같은 개념으로 읽어버리면 너무 단순하고 재미가 없어진다.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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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작품이라는데 아무리 봐도 안 믿긴다. 이런 생각을, 이런 표현을 그때도 했다고?
방공자는 머리를 한번 돌릴 만큼 짧은 시간에 붓을 휘둘러 쓰기를 마치고 동행한 선비에게 그 글을 주어 시험관에게 바치라고 한 뒤, 시험장을 두루 돌아다니며 다른 선비들이 시 짓는 것을 구경했다. 선비들 가운데는 나이 어린 소년도 있고, 혹 귀밑에 백발을 드리운 사람도 있었으며, 중년의 유생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용모가 추하고 재주가 없으며 타고난 자질도 우둔한 무리들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용모가 단정하고 기상이 화평한 청사에게 물어본 뒤 유건을 끄덕이며 쓰는 자도 있고, 한 손으로 턱을 받치고 읊조리는 자도 있었으며, 혹 먼저 지었노라 의기양양한 자도 있고, 혹 당황하여 얼굴이 검붉어져 어찌할 줄 모른 채 붓끝을 입에 물어 두 입술이 검게 물든 자도 있었다. 이를 본 공자는 한바탕 실소하더니 탄식하며 말했다. "우리나라에 인재가 드물어 과거를 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와 같으니, 가히 애달프고 안타깝도다." |
<방한림전> 中 |
너무 요즘 얘기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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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영웅소설이라고 해서 방한림에게 반하게 될 줄 알았는데 사실 방한림은 별다른 고난이나 시련 없이 과거에 급제하고, 왕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그래서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었던 그런 스토리였고, 오히려 영혜빙이 진짜로 당차고 대단한 여성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 책이었다. 나는 영혜빙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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