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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29 | 연애 소설 읽는 노인 / 루이스 세풀베다

카랑_ 2025. 2. 2.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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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우연히 좋은 책을 만나게 되면 기분이 정말 좋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그런 기분 좋은 만남이었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 / 루이스 세풀베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커버가 벗겨진 상태여서 이렇게 알록달록 예쁜 표지인지 몰랐다. 아마존 밀림과 엘 이딜리오. 그런 곳들을 상상하게 만드는 표지다. 

 

 

책 설명이 간결하고 의아했다. 연애 소설 읽기를 즐기는 노인이 있는데, 그 노인이 사는 곳에서 사체가 발견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라고 했다. 도대체 그 둘이 어떻게 엮이는 거지? 추리 소설도 아니고 연애 소설을 읽는 노인이 사체랑 엮일 일이 뭐가 있을까? 

 

 

훼손된 외지인의 사체. 노인은 그 시체에 담긴 사연을 한 눈에 알아챈다. 그렇게 시작된 살쾡이 사냥. 떠밀려 선봉에 서게 된 노인과 암살쾡이 간의 최후의 대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진하고 뭉클한 이야기였다. 연애 소설을 읽는다는 건, 주인공인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를 설명하는 가장 함축적인 표현일 뿐이다. 원주민과 동화되어 살아 온, 그러나 원주민은 아니었던 그의 삶과 그로부터 체득하고 깨달아 온 모든 것들, 세상을 보는 깊이는 그야말로 위대하고 감동적이다. 

 

 

너무너무 좋았다. 좋았다는 말 외에 뭐라고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 진짜 너무 좋은데? 

 

 


음절과 단어와 문장을 차례대로 반복하는 노인의 책읽기 방식은 특히 자신의 마음에 드는 구절이나 장면이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루이스 세풀베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 中

 

 


그들(수아르족)은 뱀에게 물린 것이 나무 사이에 숨은 딱정벌레나 개똥벌레가 가짜 별빛을 내는 것처럼 인간을 골려 주고 싶은 어린 신이나 장난꾸러기 신들이 조그만 심술을 부린 것에 지나지 않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다독거려 주었다. 

루이스 세풀베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 中

 

 


나는 글을 읽을 줄 알아.
그것은 그의 평상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었다. 그는 글을 읽을 줄 알았다. 그는 늙음이라는 무서운 독에 대항하는 해독제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읽을 줄 알았다. 

루이스 세풀베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 中

 

 

 


그가 엘 도라도에 머무는 동안 가장 많은 시간ㅇ르 할애한 책은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의 소설, 그중에서도 특히 『사랑의 학교』였다. 그는 그 책을 거의 손에서 떼지 않은채 눈이 아프도록 읽고 또 읽었다. 그러나 눈물을 쥐어짜며 그 책을 들여다보던 그의 마음 한구석에 주인공이 겪는 불행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그 많은 불행이 한 사람에게만 들이닥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롬바르디아의 소년에게 그토록 참기 힘든 고통을 안겨 주는 내용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비겁하다는 느낌이 들자 그 책을 덮어 버리고 말았다.

루이스 세풀베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 中

 

 

 


나이가 들면 느는 게 삶의 지혜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실 노인은 삶의 지혜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자신에게도 그런 미덕이 찾아오리라고 기대했고, 내심 그런 미덕이 주어지길 간절히 기원했다. 물론 그가 기대하는 미덕은 그를 과거의 자신으로 되돌아 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지혜이자 스스로 만든 덫에 빠지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지혜였다.

루이스 세풀베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 中

 

 

 


맞아. 그 짐승은 스스로 죽음을 찾아 나섰던 거야.
그랬다. 짐승이 원하는 것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인간이 베푸는 선물이나 적선에 의한 죽음이 아닌, 인간과의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싸움을 벌인 뒤에 스스로 선택하는 그런 죽음이었다. 

루이스 세풀베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 中

 

 

 


그러나 암살쾡이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럴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일순 그 짐승은 앞발을 들어 올리며 슬프고 지친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또 다른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수컷의 울음 소리였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는 소리였다. 
수컷은 암컷보다 몸집이 작았다. 그 짐승은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통나무를 보호처로 삼아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뼈에 달라붙은 등가죽과 가죽 밖으로 드러난 살점을 보고 있는 사실 자체가 가슴 아픈 사실이었다. 

「네놈이 원하는 게 이거였단 말이지? 나에게 끝장을 내달라고?」

그러나 암컷은 어느 틈에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상처 입은 수컷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수컷은 눈꺼풀조차 들어 올릴 힘도 없는지 인간의 손길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었다. 고통스런 짐승의 최후를 반기는 것은 늘 그렇듯 흰개미들이었다. 노인은 수컷의 가슴팍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기며 중얼거렸다.

「친구, 미안하군. 그 빌어먹을 양키 놈이 우리 모두의 삶을 망쳐 놓고 만 거야.」


루이스 세풀베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 中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는 틀니를 꺼내 손수건으로 감쌌다. 그는 그 비극을 시작하게 만든 백인에게, 읍장에게, 금을 찾는 노다지꾼들에게, 아니 아마존의 처녀성을 유린하는 모든 이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낫칼로 쳐낸 긴 나뭇가지에 몸을 의지한 채 엘 이딜리오를 향해, 이따금 인간들의 야만성을 잊게 해주는, 세상의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얘기하는 연애 소설이 있는 그의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루이스 세풀베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 中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을 빌릴 때, 생각보다 책이 얇아서 금방 읽겠네? 하고 같이 빌려 온 루이스 세풀베다의 다른 책 <자신의 이름을 지킨 개 이야기>도 후루룩 이어 봤다. 하... 정말.... 이것도 너무 좋네.... 너무 좋아.....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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