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고른 이유:
1. 작아서
2. 얇아서
3. EBS 위대한 수업에 슬라보예지젝이란 사람이 나온 걸 우연히 봐서
여기에 책이 예쁘고 새것같아서라는 이유까지 추가하면 완벽하다. 슬라보예 지젝이 들으면 기가 차서 웃지도 않겠지. 그런데 정말 한치의 거짓도 없이 딱 이런 이유로 나는 이 책을 골랐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KTX 안에서 보내는 시간의 "일부"를 이 책으로 채우려는 계획이었다. 너무 얇아 시간이 많이 남으면 어쩌나~ 다 읽고 나면 뭘로 또 시간을 채워야 하나~ 하는 말도 안되는 생각까지 했다. 술술 읽히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이해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완벽한 오산이었다. 와우.
이 책에 쓰인 문장 어느 것 하나도 단번에 이해되어 넘어가는 것이 없다. 문장을 꼬아 쓰거나 지나치게 화려한 수식을 주렁주렁 달고 있어서가 아니다. 간단한 한 문장 안에 두세개 이상의, 많게는 대여섯 개의 사회적/정치적/사상적 등등의 범위를 넘나드는 개념어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 개념들을 알고만 있으면 문장은 전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나의 수준은 거기에 크게 못미친다.
신호등의 파란불이 켜지면 사람들은 횡단보도를 건넌다. 반대로 차량은 빨간 불을 보고 멈춰선다. |
이런 문장에서는 이해하지 못할 게 하나도 없다. 신호등/파란불/횡단보도/차량 같은 단어가 지칭하는 것들은 단번에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하지만 이런(책에서 발췌) 문장은 내 머리를 여러 번 멈춰서게 한다.
오늘날 포스트모던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모순이 아마도 거기 있을 것이다. 이윤의 지대화는 그 논리만 보면 탈규제적이고 반국가적이고 유목적이며 탈영토적이지만, 그 핵심 경향은 (무엇보다) 규제 범위를 점점 더 넓혀가는 ‘국가state’의 역할이 강화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역동적인 탈영토화는 점점 더 국가, 그리고 국가의 법적 기구라든지 여타 기구의 권위주의적 개입과 공존하며, 그런 개입에 의지한다. 따라서 우리 역사의 지평에 새롭게 떠오르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상주의와 쾌락주의가 규제적인 국가 메커니즘의 복잡한 그물과 공존하는 (또 그에 따라 유지되는) 사회다. 오늘날 ‘국가’는 사라지기는커녕 더 강력해지고 있다. |
아는 단어들이긴 하지만 아는 "개념"은 아니다. 길지 않은 어절들에 담긴 의미와 개념이 너무 거대하다. 단순히 단어가 아니라 "개념"인 탓이다. 이것들은 신호등/파란불/횡단보도/차량처럼 단번에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난관과 한계에 부딪치는 순간 묘한 쾌감(?)이 인다. 이 세상엔 똑똑한 사람이 참 많아! 대단한 사람들이야!
이게 도대체 무슨 심리지 ㅋㅋㅋ
한번 쭉 읽고 고이 덮어뒀다가 집에 와서 1차 복습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타닥타닥 타이핑하고 싶어서 일단 타이핑을 하고, 나중에 한 번 더 손으로 필사를 해볼까 싶다. 그런다고 내가 뭘 더 이해하고 알아듣고 하겠냐마는, 평소엔 쓰지도 않고 볼 일도 없는 단어나 개념들을 이렇게라도 접해놔야겠다 싶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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