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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19 | 왕자와 거지 / 마크 트웨인

카랑_ 2025. 2. 1.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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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너무 당연히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따져보니 '왕자와 거지가 바뀐다'는 한 줄 요약 이상으로는 아는 게 없는 거. 게다가 도서관에서 만난 책의 두께가....꽤 두껍다...? 동화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이렇게 두꺼운 책 한 권짜리 장편 소설이라고....? 그럼 내가 알고 있던 <왕자와 거지>는 도대체 뭐지...? 둘이 바뀌었는데... 바뀌고..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를 내가 모르고 있는 거지...?

 

 

왕자와 거지 / 마크 트웨인

 

 

 

 

아주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었다. <왕자와 거지>는 구전 동화류가 아니라 창작자가 분명한, 풍자가 가득한 소설이었다. 그것도 역사적 사실을 상당히 반영한. 

 

 

똑같이 생긴 왕자와 거지가 우연히 만나 서로 옷을 바꾸어 입었다가 운명이 갈리는 것까지는 맞다. 그 이후 그들이 난생 처음 겪게 되는 사건 사고들이 <왕자와 거지>의 주를 이룬다. 그 과정에서 왕실의 허례허식을 신랄하게 비꼬기도 하고, 빈민 무리의 삶을 경험하는 동안 만나게 되는 인간 군상을 통해 왕자의 각성을 이끌어내기도 하며, 조건 없는 신뢰와 보상이라는 동화같은 이야기도 섞여든다. 

 

 

위치가 완전히 뒤바뀌어버리긴 했어도, 각자 나름 잘 적응한다. 과거의 기억을 잃고 정신이 이상해져버린 왕자취급을 받긴 해도 적절한 임기응변과 아주 유능한 심복(왕자 대신 매맞는 아이)을 발견한 덕분에 점점 의심을 지울 수 있었던 톰은, 얼떨결에 왕이 되어서도 온정적이고 선한 마음으로 통치하는 왕으로 인정받는다. 졸지에 거지꼴이 되고도 왕자처럼 구는 에드워드 또한, 정신나간 놈 취급을 받긴 해도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주는 헨든을 만나 제법 대접을 받게 된다. 그 과정에서 죽을뻔 하기도 하고, 우여곡절을 겪긴 하지만 그래도 매번 헨든이 나타나 구해주고 왕자님으로 받들어주니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계속 위엄을 지키긴 한다. 그래서 설마 이대로 둘 다 잘 적응해서 잘 살게 되나 싶었는데.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나서도 모두가 해피엔딩이다. 나쁜 놈은 벌을 받고, 착한 사람들은 상을 받는다. 이런 꽉 닫힌 해피엔딩의 결말 때문에 동화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나보다. 

 

 

 


또 왕자가 먹을 음식을 도맡아 먼저 맛보는 귀족도 있어 일단 명령만 떨어지면 독살당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의심 가는 요리를 언제라도 먹을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의례적인 역할만 맡고 있었을 뿐 자기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불과 몇 세대 전까지만 해도 이 일은 위험천만했기 때문에 이 직책은 그렇게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다. 도대체 왜 개나 연관공(鉛管工)한테 그 일을 시키지 않았는지 이상하게 보인다. 그러나 왕실에서 벌어지는 일 가운데 이렇게 이상한 일이 어디 한두 가지뿐이겠는가.

마크 트웨인 <왕자와 거지> 中

 

 

이런 식으로 왕실을 꼬집는 부분이 곳곳에 보인다. 표시를 안해두고 넘어가서 옮기진 못했는데, 왕자에게 양말을 하나 신긴다고 십여 명의 사람이 사람이 늘어서서 양말을 건네주고, 드디어 양말을 신기나! 했는데 양말에 올이 나갔나.. 아무튼 그래서 호들갑을 떨며 다시 넘기고 넘겨 처음의 하인(귀족이었나..)에게로 넘기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진짜 웃음밖에 안 나온다. 

 

 

 


아버지는 우리 중에서 그 녀석을 제일 사랑하고 믿었습니다. 나이가 제일 어린 데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었으니까요…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비결은 예나 지금이나 바로 그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마크 트웨인 <왕자와 거지> 中

 

 

헨든이 동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인데, 왠지 납득이 된다.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비법(?).

 

 


다른 각료가 나서서 돌아가신 선왕의 왕실 비용과 관련한 전문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선왕은 지난 여섯 달 동안 무려 2만 8000파운드에 이르는 돈을 썼던 것이다. 너무나 엄청난 액수라서 톰 캔티는 입을 딱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중 2만 파운드는 앞으로 지불해야 할 빚이라는 보고를 듣자 또 한 번 입이 딱 벌어졌다. 또한 왕실 금고는 이제 거의 바닥이 나다시피 했고, 시종 1200명은 봉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자 또다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톰은 몹시 놀라 이렇게 입을 열었다. 

"이대로 가면 우린 망합니다.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에요. 왕실의 규모를 줄이고 시종들도 대폭 정리해야 합니다. 그 많은 시종 때문에 일이 늦어지기만 하고 귀찮기만 할 뿐 아무 쓸 데가 없어요. 자꾸 그런 사람들 시중을 받다 보면 마음과 영혼을 망치게 됩니다. 인형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요. 자기 스스로 일할 만큼 머리도 없고 손도 없는 인형한테나 어울릴 사람이라고요."
마크 트웨인 <왕자와 거지> 中

 

 

왕자에서 왕으로 초고속 승진한 톰 캔티가 왕실 상황을 보고 받고 경악한다. 그리고 맞는 말만 하는 중이다. 많은 시종들에게 둘러싸여 인형놀이나 하고 있는 왕족이라니. 

 

 


재미없는 업무가 지루하게 이어졌다. 탄원서를 낭독하고, 선언과 특허, 그밖에 나랏일과 관련한 장황하고 지루한 온갖 문서를 읽었다. 마침내 톰은 처량하게 한숨을 내쉬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 인자하신 하느님께서 들판에서 마음껏 공기와 햇빛을 누리며 살던 나를 왕으로 만들어 이곳에 가두고 이토록 괴로움을 안겨 주시는 걸까?"
마크 트웨인 <왕자와 거지> 中

 

 

가난하고 불우했지만 그래도 자유로웠던 그 때를 그리워하는 톰 캔티. 왕으로서 누리는 풍요로움을 '잘못을 저질러 받는 괴로움'이라고 느끼고 있다. 

 

 

 


왕은 이제 기분이 좋고 행복했다. 그래서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궁전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자나 깨나 어린아이들을 잘 보살펴 줘야겠어. 내가 어려움에 놓여 있을 때 아이들이 나를 철석같이 믿어 주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자. 한편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나이 든 사람들은 나를 비웃고 거짓말쟁이 취급을 했지."

마크 트웨인 <왕자와 거지> 中

 

 

반면 왕자는 밑바닥에서 구르고 깨지면서 하나씩 깨달아가고 있다. 

 

 


"폐하, 소인이 신원을 증명하고 제 소유권을 되찾을 때까지는 이곳에서 기다리는 게 최선책이 아니겠나이까? 지금 같아서는 소인만큼 더욱 잘할 수 있는…"

그러자 왕이 명령조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요! 나라의 안녕과 왕실의 법통이 달려 있는 문제와 비교하여 자네의 하찮은 재산, 자네의 하찮은 이해관계가 뭐 그리 대단하단 말이오!"
마크 트웨인 <왕자와 거지> 中

 

 

그치만 이러는 걸 보면 왕자는 왕자다. 애가 싸가지가 없어. 아무리 그게 당연한 환경에서 살아왔다고는 해도 지금까지 거의 유일하게 자신을 믿고 지켜 준 헨든한테 말하는 꼬라지 봐. 재산은 그렇다 치는데 이해관계까지 하찮대. 하, 참. 

 

이러고 바로 아차싶어 꼬리를 내리긴 하는데, 이미 내뱉은 말이 너무 싸가지가 없다.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어 고생하는 왕자를 동정하고 연민하는 맘이 생기다가도 이러는 거 때문에 움찔하고 정신차린 게 몇 번 된다. 

 

 

 


"아무도 나를 믿지 않는군요.... 그건 그대도 마찬가지일 테지요. 하지만 아무래도 좋소이다.... 앞으로 한 달 안에 나는 그대를 자유의 몸으로 풀어 주겠소. 더구나 그대에게 불명예를 안겨 주고 이 나라 영국의 이름을 욕되게 한 그 법도 이 나라의 법령집에서 싹 쓸어 낼 것이오. 세상은 지금 잘못되어 있소이다. 왕들도 가끔씩 자기가 만든 법한테서 가르침을 받고 자비심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오."

마크 트웨인 <왕자와 거지> 中

 

 

사실 <왕자와 거지는> 왕자의 성장기나 다름 없다. 왕자가 된 거지가 아주 잠깐 왕의 자리를 대리하며 의외의 성과를 내는 것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거지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철이 들고 세상을 더 크고 넓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된 왕자가 진정한 왕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톰 캔티는 자신한테 그토록 친절을 베풀고, 궁전 대문을 지키고 서 있던 병사의 건방진 행동을 꾸짖기 위해 불같은 마음으로 달려 나간 진짜 왕자에 대해 생각하면서 한 번도 가슴 아파한 적이 없단 말인가? 물론 그를 생각하며 가슴 아파한 적이 있었다. 궁전에 들어온 처음 얼마 동안은 낮이고 밤이고 행방불명된 왕자 생각으로 고통스러웠고, 왕자가 하루빨리 돌아와 타고난 권리와 영광을 되찾기를 진심으로 바라 마지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왕자가 나타나지 않자 톰의 마음은 새로 맛보게 되는 활홀한 경험에 점점 몰두하게 되었다. 행방불명된 왕자에 대한 기억도 머릿속에서 점점 희미하게 사라지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주 가끔 왕자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면 톰은 왕자를 반갑지 않은 유령처럼 여겼다. 왕자는 톰에게 죄의식과 수치심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 <왕자와 거지> 中

 

 

왕실에서의 생활을 괴로워만 하던 톰 캔티도 어느덧 적응을 해간다. 하지만 왕자를 생각하면, 그리고 여전히 고통받으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렇다고 가족을 찾아다 대접을 해주자니 자신의 의심받고 출신이 들통날까 두려운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어서 말해 보아라, 얘야. 두려워할 것 없다."

왕이 다시 말했다.


"영국의 국새를 무슨 일에 사용하였느냐?"


애처롭게도 톰은 당황한 나머지 잠시 더듬거리다가 이렇게 내뱉었다.


"호두 까는 데 썼사옵니다!"
마크 트웨인 <왕자와 거지> 中

 

 

마지막에 각자의 위치를 되찾는 장면에서 나오는 귀여운 에피소드다. 호두까기에 딱이었던 영국의 국새. 

 

 


왕의 부유한 신하인 어떤 고위 관리가 왕의 관대한 정책에 여러 번 반기를 들며, 지금 왕이 온 힘을 다해 고치려고 하는 어떤 법이 너무나 너그러워서 막상 고통이나 고난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한테 그런 것을 주지 못한다고 주장하자, 왕은 애틋하면서도 동정 어린 눈길로 그 신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고통 받고 고난을 당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경은 아시오? 짐도 백성도 알고 있지만, 경은 잘 모를 것이오."

그 무렵은 잔인한 시대였지만 에드워드 6세가 다스리던 기간은 특별히 자비로웠다.
마크 트웨인 <왕자와 거지> 中

 

 

성군이 된 왕자의 이야기로 마무리. 

 

 

 

왕자와 거지가 동화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놀랍다. 그리고 마크 트웨인이라는 이름도 너무 익숙한데, 그게 <왕자와 거지>의 작가와 연결이 된다는 것도 신기하다. 더 놀라운 건, 마크 트웨인의 본명이 새뮤얼 랭혼 클레멘스라는 거였다. 오. 굉장히 어렵고 기억하기 힘든 이름이군. 필명 너무 멋지게 잘 지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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