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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자의 <모순>을 읽고, 우리말로 쓴 우리문학이 얼마나 편안하게 읽히는지를 새삼 깨달은 뒤 제일 먼저 생각한 게 바로 이거였다. 박완서 작가의 글들을 읽어보면 어떨까. 그동안은 왠지 재미없을 것 같아 외면하던 걸, 지금이라면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도서관에 가서 일단 눈에 익숙한 아무거나 빌려 온 것이 이것.
아주 오래된 농담 /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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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들어본 적 있는데, 내용은 전혀 몰랐다. 그래서 처음 시작에 등장하는 남자 둘, 여자 하나인 초등학교 동창 셋의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렇다면, 공부 잘 하고 의사가 되기를 꿈꿨던 남자 둘의 경쟁에 관한 이야기일까? 역시 아님. 이야기는 아주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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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의 희망처럼 의사가 된 영빈과 그의 동생 영묘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영빈은 대학병원의 의사로 이름을 날리고,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생 영묘는 일명 재벌가의 며느리로 시집을 간다. 영묘의 남편, 그러니까 재벌가의 아들이 암에 걸리게 되어 자연스레 의사인 영빈과도 얽히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재벌이라고 하는 집안의 민낯과 환자의 알 권리와 같은 것들이 매우 진지하게 엮인다.
그리고 영빈의 불륜 역시 꽤 비중을 두고 벌어지는데, 불륜의 상대는 바로 그때 그 초등학교인 현금이다. <아주 오래된 농담>이라는 제목은 영빈과 현금의 관계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릴 적 현금이 던졌던 한마디가 영빈은 물론 또 한 명의 동창인 한광에게까지 아주 오래도록 깊게 새겨져 있었던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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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짝없이 순종하고 살아야 하는 영묘의 상황과 영빈의 두집살림과 같은 이런저런 답답한 상황 속에서도 그래도 숨통이 트이는 건, 인물의 말과 생각을 통해 드러나는 구시대적 사상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시원하게 느껴져서인 것 같다.
" 그동안 당신의 며느리 설움을 너무 몰라라 한 건 내가 사과할게. 우리 사회가 여자에게 얼마나 악랄하고 불리하게 돼먹었다는 건, 영묘 때문에 속 썩이면서 치 떨리게 겪었잖아. 인간이 인간에게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일이야. 인간이 이성으로 고쳐나가지 못하면 천벌이라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시정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비해 힘이 딸리는 건 아직도 딸의 부모들이 딸 가진 설움을 아들에 의해 보상받으려는 구닥다리 생각에 젖어 있기 때문이야. 보상받을 길 없는 딸딸이 아빠가 늘어날수록 딸들이 사람 노릇할 수 있는 정당한 노력이 힘을 받게 될 거 아닌가. (생략) " " 우리 동료 교사가 한 소린데 페미니스트인 척하는 남자를 젤루 조심해야 된대. 위선자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족속이래나 봐. " 아내는 눈을 흘기며 애교스럽게 말했지만 영빈은 뜨끔했다. |
박완서 <아주 오래된 농담> 中 |
아내의 몸 속에는 내 아들뿐 아니라 이 나라의 유구한 여성잔혹사가 압축돼 있다. |
박완서 <아주 오래된 농담> 中 |
너 보기엔 저 할 도리 못한 장남 콤플렉스처럼 보였는지도 모르지만, 내 진심은 여자들 문제를 남자 위주로만 생각하지 말고 여자들하고 한 번 입장을 바꿔 생각하자 이거야. |
박완서 <아주 오래된 농담>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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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을 빌려 <아주 오래된 농담>의 소개하자면,
궁여지책으로 연재를 시작할 때 의욕에 넘쳐 한 말을 꺼내 읽어보았다. 장차 이 소설을 이끌어갈 줄거리는, 환자는 자기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생명의 시한까지도━에 대해 주치의가 알고 있는 것만큼은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의사와, 가족애를 빙자하여 진실을 은폐하려는 가족과, 그것을 옹호하는 사회적 통념과의 갈등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통해 작가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자본주의에 대해서이다. 여기까지 읽다가 피식 웃음이 나면서 뭘 자본주의씩이나, 적나라하게 그냥 돈으로 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에 대해서 말한다는 게 여성의 현실에 대해 말하는 게 돼버린 것도 독자가 눈여겨 봐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박완서 <아주 오래된 농담> 초판 작가 후기 中 |
근데 정말 여기 쓰인 내용이 그대로 소설에 다 녹아 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은 여성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된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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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한 어휘들을 얻었다. 몇몇개는 대충 알 것 같으니까 그냥 무시하고 넘기기도 했다. 재미있고 신나는 단어장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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